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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 기자]
▲ 로제타 셔우드 홀 한국 여성 의료인의 어머니로 꼽히는 미국인 의료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
ⓒ 1. 고려대의료원
1885년 4월 14일 호러스 알렌이 광혜원(제중원)을 서울 재동 릴게임야마토 에 개설한 데 이어 윌리엄 스크랜턴이 그해 6월 15일 정동 자택에서 진료를 시작했어도 조선 여성들은 근대 서양 의학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남자 의사, 그것도 서양인에게 차마 몸을 맡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윌리엄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이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부에 여러 차례 여의사 파견을 요청하자 메타 하워드가 1 바다이야기5만 887년 10월 28일 입국했다. 그는 윌리엄이 이화학당 옆에 새로 간판을 내건 시병원(施病院)의 방 한 칸에서 10월 31일 첫 환자를 받았다.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은 이날을 출발로 삼고 있다.
여의사가 왔어도 여성 환자들은 좀처럼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남성들과 같은 공간에서 옷을 걷어 환부를 보여주기를 꺼렸기 때 릴게임뜻 문이다. 이듬해 11월 한옥 한 채를 개조해 여성 전용 병원으로 꾸민 뒤에야 마음 놓고 드나들었다. 고종은 그해 12월 보구녀관(普救女館·널리 여성을 구하는 집)이란 이름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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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구녀관 1888년 11월 서울 정동의 한옥 한 채를 개조해 꾸민 최초의 여성 전용 병원 보구녀관. 위쪽 마루에 앉아 있는 여성이 로제타 셔우드 홀이다.
ⓒ 이화의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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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 하워드가 과로로 건강을 해쳐 1889년 가을 귀국하자 보구녀관은 한동안 제 기능을 못하다가 1890년 10월 15일 로제타 셔우드가 부임했다. 1865년 미국 뉴욕주 태생으로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현 드렉셀대 의과대)를 졸업하고 뉴욕 빈민가 무료진료소에서 봉사하다가 한국행을 자원했다.
자기 팔에서 피부 떼어내 환자에게 이식 수술
로제타는 몸을 아끼지 않고 환자를 돌봤다. 3대 보구녀관 원장으로 일하던 3년간 그를 찾은 환자는 1만 4000명이 넘는다. 화상으로 손가락이 붙어버린 소녀를 수술하다가 피부 이식을 위해 환자 팔에서 피부를 떼어내려 하자 환자가 완강히 거부했다. 로제타는 자기 팔에서 피부를 떼어내 이식했다.
로제타 곁에는 이화학당에서 영어를 가장 잘해 통역 겸 조수로 뽑힌 13살 소녀 김점동이 있었다. 점동의 친구인 일본인 오와가도 로제타를 도왔다. 점동은 언청이라고 놀림당하던 구순구개열 환자가 수술을 받은 뒤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로제타는 점동과 오와가에게 기초적인 의료 보조 업무를 가르치다가 1891년 초 이화학당 학생 3명을 더 모아 생리학과 약리학 등을 가르치는 의학반 수업을 시작했다. 우리나라 여성 근대의학 교육의 효시였다. 1908년 보구녀관 간호원양성소를 졸업해 국내 최초의 간호사가 된 김마르다와 이그레이스(이복업)도 로제타의 수업을 들었다.
▲ 국내 최초의 간호사들 1908년 보구녀관 간호원양성소를 졸업해 국내 최초의 간호사가 된 이그레이스(이복업·왼쪽)와 김마르다가 간호원 자격증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이화의료원
로제타에게는 빈민가 무료 진료소에서 만난 캐나다 출신의 약혼자 윌리엄 제임스 홀이 있었다.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파견돼 1891년 12월 18일 서울에서 재회했다. 로제타는 5년간 독신으로 의료선교에 임하기로 감리교선교회와 계약을 맺었지만 자신을 대신해 누군가 파견되면 경비를 반환하겠다면서 결혼을 강행했다.
1892년 6월 27일 서울 정동의 영국 공사관과 스크랜턴 대부인 집에서 차례로 영국식과 미국식 결혼식을 올렸다. 중국 옌타이로 밀월여행을 다녀온 뒤 스크랜턴의 시병원과 보구녀관에서 각기 바쁜 나날을 보냈다. 결혼 후 3개월 만에 윌리엄은 감리교 평양 선교 책임자로 부임했다. 로제타는 1893년 3월 볼드윈진료소를 동대문 옆에 개설했다. 볼드윈진료소는 보구녀관과 통합되면서 릴리언 해리스 기념병원으로 개명했다가 동대문부인병원을 거쳐 이화여대 부속병원으로 발전했다.
서양인 여성과 아기 보려고 구경꾼 몰려들어
그해 로제타에게는 경사가 겹쳤다. 5월 24일 점동을 신심 깊은 마부 출신의 박여선과 결혼시켰다. 1891년 세례명으로 개명한 점동은 서양식 풍습대로 남편 성을 따 박에스더가 됐다. 그해 11월 10일에는 로제타는 아들 셔우드 홀을 낳았다.
1894년 5월 로제타도 아들을 데리고 평양에 부임했다. 서양인 여성과 아기를 처음 보는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조를 짜서 차례로 집안에 들여보내야 했다. 홀 부부의 평양살이는 한 달도 가지 못했다. 청일전쟁의 전운이 감돌자 서울로 철수했다.
▲ 로제타 가족과 박에스더 부부 로제타 셔우드 홀(가운데) 가족이 박에스더(왼쪽)·박여선 부부와 함께 촬영한 사진. 로제타 품에 안긴 아기가 딸 이디스이고 왼쪽이 아들 셔우드다.
ⓒ 이화의료원
짧은 평양 체류 기간에도 로제타는 끊임없이 새로운 일을 찾았다. 기름 먹인 한지에 바늘로 구멍을 뚫어 초보적인 한글 점자를 만든 뒤 오석형의 시각장애인 딸 봉래에게 가르쳤다. 최초의 장애인 특수교육기관 평양여자맹학교의 기원이었다. 오봉래는 일본 도쿄맹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 특수교육 교사 1호가 됐다. 평양맹아학교에 근무하며 '조선의 헬렌 켈러'로 불렸다.
9월 15일 벌어진 평양 전투가 이틀 만에 일본군의 승리로 끝나자 윌리엄은 부상자를 치료해야 한다며 10월 1일 평양으로 돌아갔다. 과로에 시달리던 윌리엄은 발진티푸스에 감염돼 서울로 후송됐다가 11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셔우드는 돌을 갓 넘겼고 로제타 뱃속에는 딸 이디스가 자라고 있었다.
▲ 로제타 홀 일기 로제타 셔우드 홀이 쓴 일기. 1~4권은 1890년 8월 21일부터 1894년 10월 1일까지의 기록이고 5~6권은 두 자녀의 육아일기다. 왼쪽 사진이 로제타의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
ⓒ 양화진문화원
윌리엄은 서울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혔다. 로제타는 출산을 위해 아들을 데리고 1894년 12월 7일 조선을 떠났다. 이듬해 1월 14일 집에 도착해 4개월 만에 유복자를 낳았다. 친구들이 모아준 돈을 보태 남편을 기리는 기홀(紀忽)병원을 평양에 지어 1897년 2월 1일 개원했으며, 남편의 전기 <윌리엄 제임스 홀 의사의 생애>를 집필해 그해 8월 미국에서 출간했다. 뉴욕 점자를 응용해 최초의 한글 점자(평양점자)도 만들었다.
로제타는 미국으로 돌아갈 때 박에스더 부부를 데리고 갔다. 한국 여성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된 박에스더는 뉴욕 리버티공립학교와 볼티모어여자의과대(현 존스홉킨스대)를 졸업하고 1900년 의사 면허를 따냈다. 남편은 농장과 식당에서 밤낮없이 일하며 아내의 학비를 보태다가 의대 졸업시험 3주 전 폐결핵으로 숨졌다.
한국인이 양의사가 된 것은 1893년 서재필에 이어 두 번째이고 여성으로는 처음이었다. 박에스더는 1900년 가을 귀국해 이듬해 5대 보구녀관 관장이 됐다. 서재필이 모국에서 의사 활동을 한 적이 없으니 박에스더가 국내 의사 1호나 마찬가지였다.
셔우드 진로 바꾸게 만든 박에스더 죽음
로제타는 박에스더에 앞서 1897년 11월 서울로 돌아와 보구녀관에서 다시 환자들을 돌보다가 이듬해 4월 평양 기홀병원으로 옮겼다. 한 달 만에 딸 이디스가 숨져 남편 곁에 묻었으나 슬픔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6월 18일 감리교 해외여선교부 건물 한 편에 우리나라 두 번째 여성 전용 병원인 광혜여원(廣惠女院)을 열어야 했기 때문이다. 광혜여원과 기홀병원은 평양장로교병원과 합쳐 1923년 평양연합기독병원이 됐다가 김일성종합대 부속병원을 거쳐 평양의학대병원으로 탈바꿈했다.
1900년 1월에는 딸 이름을 딴 최초의 소아과 병동(이디스 마거릿 어린이 병동)을 광혜여원에 지었다. 한쪽 옆에는 평양여자맹학교 교실을 마련해 시각장애인들에게 평양 점자와 함께 산수, 음악, 편물, 안마 등을 가르쳤다. 1909년에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최초의 농학교도 설립한 뒤 평양맹아학교(平壤盲啞學校)로 이름을 바꿨다. 평안도 사람들은 로제타를 '평양의 오마니'라고 불렀다.
박에스더도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헌신적으로 일했다. 해마다 3천 건 넘게 진료했고 1904년에는 진료 건수가 8천여 건에 이르렀다. 1년 평균 왕진 건수도 100여 회를 헤아렸다. 눈이 오면 당나귀에 썰매를 매달고 거동이 불편한 환자 집을 찾았다. 그러나 귀국한 지 10년 만에 폐결핵에 걸려 1910년 4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윌리엄과 같은 34살 때였다.
로제타는 몸 한쪽이 떨어져나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가난하고 영특한 소녀에서 성실한 조수를 거쳐 믿음직한 의사로 성장한 에스더는 로제타의 자랑이자 든든한 조력자였다. 환자들도 유일하게 말이 통해 '우리 의사'라고 부르던 그가 떠나자 가족을 잃은 것처럼 슬퍼했다.
어릴 적부터 한 가족처럼 가깝게 지내던 셔우드도 에스더가 결핵으로 숨졌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고 진로까지 바꿨다. 사업가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의사가 돼 조선에서 결핵 퇴치에 앞장서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 연극 로제타 국립극단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재단이 로제타 셔우드 홀 일대기를 연극으로 꾸민 ‘로제타’. 2025년 8월 서울 명동예술극장과 9월 부산 영화의전당 등에서 공연됐다.
ⓒ 옐로밤
로제타는 1910년 아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사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안식년을 보냈다. 아들을 미국 고등학교에 입학시키고 홀로 돌아와 1912년 광혜여원 안에 여성 의학강습반을 열었다.
강습반 과정을 마친 수강생들을 의학전문학교에 입학시키려 했으나 선교사들이 세운 세브란스의전마저 거부했다.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에 사정한 끝에 1914년 김영흥·안수경·김해지 3명이 청강생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들은 로제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4년 뒤 의사 면허증을 손에 쥐었다. 박에스더 이후 18년 만에 여의사가 탄생한 것이다. 그에 앞서 광혜여원 수간호사 이그레이스는 로제타에게 산부인과 임상훈련을 받은 뒤 1914년 준의사 자격인 의생(醫生) 면허를 얻어 최초의 여성 개업의가 됐다.
총독부의원 의학강습소가 1916년 경성의학전문의학교(현 서울대 의과대)로 재편되자 여자 청강생을 받아주지 않았다. 로제타는 1928년 5월 14일 조선여자의학전문학교 창립 발기인 모임을 열고 전 단계로 9월 4일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설립했다. 1934년 첫 번째 졸업식이 열리고 5명 전원이 의사 면허 시험에 합격했다. 마침내 로제타의 꿈이 이뤄진 것이다.
조선여자의학강습소는 재정난에 허덕이다가 우석 김종익의 도움으로 1938년 5월 1일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로 승격했다. 경성여의전은 서울여자의과대, 수도의과대, 우석대 의과대를 거쳐 1971년 고려대 의과대로 발전했다.
로제타는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1933년 10월 2일 조선을 떠나 미국 뉴저지에서 지내다가 1951년 4월 5일 8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유해는 양화진 남편 곁에 묻혔다. 2024년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됐다.
로제타 손에서 탄생한 '최초'의 기록들
로제타가 떠났어도 한국인을 위한 홀 가족의 헌신은 계속됐다. 아들 셔우드는 토론토대 의대를 졸업하고 뉴욕 결핵요양소에서 전문의로 활동하다가 1926년 의사 아내 메리언 버텀리와 함께 조선으로 왔다. 해주구세병원 원장과 운산금광 담당의사를 맡아 환자들을 진료하는 한편 의창학교 교장도 겸했다.
셔우드는 1928년 최초의 결핵 전문 요양원인 해주구세요양원을 세웠다. 결핵 퇴치 사업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1932년 12월 국내 최초로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했다. 박에스더와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1938년에는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화진포에 선교사 별장을 지었다. 1948년 김일성 일가가 묵은 적이 있어 김일성 별장으로 흔히 불리는데, 셔우드 홀 가족의 발자취가 전시돼 있다.
▲ 국내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 셔우드 홀이 1932년 12월 3일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행한 크리스마스 실.
ⓒ 대한결핵협회
셔우드는 1941년 간첩 혐의로 일제에 체포된 뒤 5000엔 벌금형을 받고 추방됐다. 1963년 은퇴할 때까지 인도에서 결핵 퇴치에 헌신했으며 1991년 4월 5일 미국 리치먼드에서 9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1984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고, 대한결핵협회는 1993년 탄생 100주년을 맞아 양화진 묘소에 공적비를 세웠다.
로제타의 손에서 탄생한 '최초'는 한두 개가 아니다. 여자의학강습소, 맹아학교, 소아과 병동, 한글점자, 여의사, 특수교육 교사 등 모두 값진 것이다. 크리스마스 실 등 가족으로 넓히면 더 많다. 로제타 부부와 셔우드 부부가 2대에 걸쳐 이 땅에서 봉사한 기간은 60년에 이른다.
3월 24일은 제45회 세계 결핵의 날이자 제16회 결핵 예방의 날이다. 아직도 결핵에 신음하는 환자가 적지 않다. 이날은 결핵 예방과 치료에 관심을 기울이는 날이면서 로제타 셔우드 홀 가족의 헌신을 기리는 날이다.
▲ 로제타 셔우드 홀 가족 묘역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윌리엄과 로제타 홀 부부, 셔우드와 메리언 홀 부부, 셔우드의 여동생 이디스, 셔우드의 딸 프랭크 6명이 잠들어 있다. 묘비 왼쪽은 대한결핵협회가 1993년 셔우드 홀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세운 공적비.
ⓒ 이희용
덧붙이는 글
▲ 로제타 셔우드 홀 한국 여성 의료인의 어머니로 꼽히는 미국인 의료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
ⓒ 1. 고려대의료원
1885년 4월 14일 호러스 알렌이 광혜원(제중원)을 서울 재동 릴게임야마토 에 개설한 데 이어 윌리엄 스크랜턴이 그해 6월 15일 정동 자택에서 진료를 시작했어도 조선 여성들은 근대 서양 의학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남자 의사, 그것도 서양인에게 차마 몸을 맡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윌리엄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이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부에 여러 차례 여의사 파견을 요청하자 메타 하워드가 1 바다이야기5만 887년 10월 28일 입국했다. 그는 윌리엄이 이화학당 옆에 새로 간판을 내건 시병원(施病院)의 방 한 칸에서 10월 31일 첫 환자를 받았다.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은 이날을 출발로 삼고 있다.
여의사가 왔어도 여성 환자들은 좀처럼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남성들과 같은 공간에서 옷을 걷어 환부를 보여주기를 꺼렸기 때 릴게임뜻 문이다. 이듬해 11월 한옥 한 채를 개조해 여성 전용 병원으로 꾸민 뒤에야 마음 놓고 드나들었다. 고종은 그해 12월 보구녀관(普救女館·널리 여성을 구하는 집)이란 이름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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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구녀관 1888년 11월 서울 정동의 한옥 한 채를 개조해 꾸민 최초의 여성 전용 병원 보구녀관. 위쪽 마루에 앉아 있는 여성이 로제타 셔우드 홀이다.
ⓒ 이화의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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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 하워드가 과로로 건강을 해쳐 1889년 가을 귀국하자 보구녀관은 한동안 제 기능을 못하다가 1890년 10월 15일 로제타 셔우드가 부임했다. 1865년 미국 뉴욕주 태생으로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현 드렉셀대 의과대)를 졸업하고 뉴욕 빈민가 무료진료소에서 봉사하다가 한국행을 자원했다.
자기 팔에서 피부 떼어내 환자에게 이식 수술
로제타는 몸을 아끼지 않고 환자를 돌봤다. 3대 보구녀관 원장으로 일하던 3년간 그를 찾은 환자는 1만 4000명이 넘는다. 화상으로 손가락이 붙어버린 소녀를 수술하다가 피부 이식을 위해 환자 팔에서 피부를 떼어내려 하자 환자가 완강히 거부했다. 로제타는 자기 팔에서 피부를 떼어내 이식했다.
로제타 곁에는 이화학당에서 영어를 가장 잘해 통역 겸 조수로 뽑힌 13살 소녀 김점동이 있었다. 점동의 친구인 일본인 오와가도 로제타를 도왔다. 점동은 언청이라고 놀림당하던 구순구개열 환자가 수술을 받은 뒤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로제타는 점동과 오와가에게 기초적인 의료 보조 업무를 가르치다가 1891년 초 이화학당 학생 3명을 더 모아 생리학과 약리학 등을 가르치는 의학반 수업을 시작했다. 우리나라 여성 근대의학 교육의 효시였다. 1908년 보구녀관 간호원양성소를 졸업해 국내 최초의 간호사가 된 김마르다와 이그레이스(이복업)도 로제타의 수업을 들었다.
▲ 국내 최초의 간호사들 1908년 보구녀관 간호원양성소를 졸업해 국내 최초의 간호사가 된 이그레이스(이복업·왼쪽)와 김마르다가 간호원 자격증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이화의료원
로제타에게는 빈민가 무료 진료소에서 만난 캐나다 출신의 약혼자 윌리엄 제임스 홀이 있었다.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파견돼 1891년 12월 18일 서울에서 재회했다. 로제타는 5년간 독신으로 의료선교에 임하기로 감리교선교회와 계약을 맺었지만 자신을 대신해 누군가 파견되면 경비를 반환하겠다면서 결혼을 강행했다.
1892년 6월 27일 서울 정동의 영국 공사관과 스크랜턴 대부인 집에서 차례로 영국식과 미국식 결혼식을 올렸다. 중국 옌타이로 밀월여행을 다녀온 뒤 스크랜턴의 시병원과 보구녀관에서 각기 바쁜 나날을 보냈다. 결혼 후 3개월 만에 윌리엄은 감리교 평양 선교 책임자로 부임했다. 로제타는 1893년 3월 볼드윈진료소를 동대문 옆에 개설했다. 볼드윈진료소는 보구녀관과 통합되면서 릴리언 해리스 기념병원으로 개명했다가 동대문부인병원을 거쳐 이화여대 부속병원으로 발전했다.
서양인 여성과 아기 보려고 구경꾼 몰려들어
그해 로제타에게는 경사가 겹쳤다. 5월 24일 점동을 신심 깊은 마부 출신의 박여선과 결혼시켰다. 1891년 세례명으로 개명한 점동은 서양식 풍습대로 남편 성을 따 박에스더가 됐다. 그해 11월 10일에는 로제타는 아들 셔우드 홀을 낳았다.
1894년 5월 로제타도 아들을 데리고 평양에 부임했다. 서양인 여성과 아기를 처음 보는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조를 짜서 차례로 집안에 들여보내야 했다. 홀 부부의 평양살이는 한 달도 가지 못했다. 청일전쟁의 전운이 감돌자 서울로 철수했다.
▲ 로제타 가족과 박에스더 부부 로제타 셔우드 홀(가운데) 가족이 박에스더(왼쪽)·박여선 부부와 함께 촬영한 사진. 로제타 품에 안긴 아기가 딸 이디스이고 왼쪽이 아들 셔우드다.
ⓒ 이화의료원
짧은 평양 체류 기간에도 로제타는 끊임없이 새로운 일을 찾았다. 기름 먹인 한지에 바늘로 구멍을 뚫어 초보적인 한글 점자를 만든 뒤 오석형의 시각장애인 딸 봉래에게 가르쳤다. 최초의 장애인 특수교육기관 평양여자맹학교의 기원이었다. 오봉래는 일본 도쿄맹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 특수교육 교사 1호가 됐다. 평양맹아학교에 근무하며 '조선의 헬렌 켈러'로 불렸다.
9월 15일 벌어진 평양 전투가 이틀 만에 일본군의 승리로 끝나자 윌리엄은 부상자를 치료해야 한다며 10월 1일 평양으로 돌아갔다. 과로에 시달리던 윌리엄은 발진티푸스에 감염돼 서울로 후송됐다가 11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셔우드는 돌을 갓 넘겼고 로제타 뱃속에는 딸 이디스가 자라고 있었다.
▲ 로제타 홀 일기 로제타 셔우드 홀이 쓴 일기. 1~4권은 1890년 8월 21일부터 1894년 10월 1일까지의 기록이고 5~6권은 두 자녀의 육아일기다. 왼쪽 사진이 로제타의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
ⓒ 양화진문화원
윌리엄은 서울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혔다. 로제타는 출산을 위해 아들을 데리고 1894년 12월 7일 조선을 떠났다. 이듬해 1월 14일 집에 도착해 4개월 만에 유복자를 낳았다. 친구들이 모아준 돈을 보태 남편을 기리는 기홀(紀忽)병원을 평양에 지어 1897년 2월 1일 개원했으며, 남편의 전기 <윌리엄 제임스 홀 의사의 생애>를 집필해 그해 8월 미국에서 출간했다. 뉴욕 점자를 응용해 최초의 한글 점자(평양점자)도 만들었다.
로제타는 미국으로 돌아갈 때 박에스더 부부를 데리고 갔다. 한국 여성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된 박에스더는 뉴욕 리버티공립학교와 볼티모어여자의과대(현 존스홉킨스대)를 졸업하고 1900년 의사 면허를 따냈다. 남편은 농장과 식당에서 밤낮없이 일하며 아내의 학비를 보태다가 의대 졸업시험 3주 전 폐결핵으로 숨졌다.
한국인이 양의사가 된 것은 1893년 서재필에 이어 두 번째이고 여성으로는 처음이었다. 박에스더는 1900년 가을 귀국해 이듬해 5대 보구녀관 관장이 됐다. 서재필이 모국에서 의사 활동을 한 적이 없으니 박에스더가 국내 의사 1호나 마찬가지였다.
셔우드 진로 바꾸게 만든 박에스더 죽음
로제타는 박에스더에 앞서 1897년 11월 서울로 돌아와 보구녀관에서 다시 환자들을 돌보다가 이듬해 4월 평양 기홀병원으로 옮겼다. 한 달 만에 딸 이디스가 숨져 남편 곁에 묻었으나 슬픔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6월 18일 감리교 해외여선교부 건물 한 편에 우리나라 두 번째 여성 전용 병원인 광혜여원(廣惠女院)을 열어야 했기 때문이다. 광혜여원과 기홀병원은 평양장로교병원과 합쳐 1923년 평양연합기독병원이 됐다가 김일성종합대 부속병원을 거쳐 평양의학대병원으로 탈바꿈했다.
1900년 1월에는 딸 이름을 딴 최초의 소아과 병동(이디스 마거릿 어린이 병동)을 광혜여원에 지었다. 한쪽 옆에는 평양여자맹학교 교실을 마련해 시각장애인들에게 평양 점자와 함께 산수, 음악, 편물, 안마 등을 가르쳤다. 1909년에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최초의 농학교도 설립한 뒤 평양맹아학교(平壤盲啞學校)로 이름을 바꿨다. 평안도 사람들은 로제타를 '평양의 오마니'라고 불렀다.
박에스더도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헌신적으로 일했다. 해마다 3천 건 넘게 진료했고 1904년에는 진료 건수가 8천여 건에 이르렀다. 1년 평균 왕진 건수도 100여 회를 헤아렸다. 눈이 오면 당나귀에 썰매를 매달고 거동이 불편한 환자 집을 찾았다. 그러나 귀국한 지 10년 만에 폐결핵에 걸려 1910년 4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윌리엄과 같은 34살 때였다.
로제타는 몸 한쪽이 떨어져나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가난하고 영특한 소녀에서 성실한 조수를 거쳐 믿음직한 의사로 성장한 에스더는 로제타의 자랑이자 든든한 조력자였다. 환자들도 유일하게 말이 통해 '우리 의사'라고 부르던 그가 떠나자 가족을 잃은 것처럼 슬퍼했다.
어릴 적부터 한 가족처럼 가깝게 지내던 셔우드도 에스더가 결핵으로 숨졌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고 진로까지 바꿨다. 사업가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의사가 돼 조선에서 결핵 퇴치에 앞장서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 연극 로제타 국립극단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재단이 로제타 셔우드 홀 일대기를 연극으로 꾸민 ‘로제타’. 2025년 8월 서울 명동예술극장과 9월 부산 영화의전당 등에서 공연됐다.
ⓒ 옐로밤
로제타는 1910년 아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사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안식년을 보냈다. 아들을 미국 고등학교에 입학시키고 홀로 돌아와 1912년 광혜여원 안에 여성 의학강습반을 열었다.
강습반 과정을 마친 수강생들을 의학전문학교에 입학시키려 했으나 선교사들이 세운 세브란스의전마저 거부했다.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에 사정한 끝에 1914년 김영흥·안수경·김해지 3명이 청강생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들은 로제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4년 뒤 의사 면허증을 손에 쥐었다. 박에스더 이후 18년 만에 여의사가 탄생한 것이다. 그에 앞서 광혜여원 수간호사 이그레이스는 로제타에게 산부인과 임상훈련을 받은 뒤 1914년 준의사 자격인 의생(醫生) 면허를 얻어 최초의 여성 개업의가 됐다.
총독부의원 의학강습소가 1916년 경성의학전문의학교(현 서울대 의과대)로 재편되자 여자 청강생을 받아주지 않았다. 로제타는 1928년 5월 14일 조선여자의학전문학교 창립 발기인 모임을 열고 전 단계로 9월 4일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설립했다. 1934년 첫 번째 졸업식이 열리고 5명 전원이 의사 면허 시험에 합격했다. 마침내 로제타의 꿈이 이뤄진 것이다.
조선여자의학강습소는 재정난에 허덕이다가 우석 김종익의 도움으로 1938년 5월 1일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로 승격했다. 경성여의전은 서울여자의과대, 수도의과대, 우석대 의과대를 거쳐 1971년 고려대 의과대로 발전했다.
로제타는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1933년 10월 2일 조선을 떠나 미국 뉴저지에서 지내다가 1951년 4월 5일 8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유해는 양화진 남편 곁에 묻혔다. 2024년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됐다.
로제타 손에서 탄생한 '최초'의 기록들
로제타가 떠났어도 한국인을 위한 홀 가족의 헌신은 계속됐다. 아들 셔우드는 토론토대 의대를 졸업하고 뉴욕 결핵요양소에서 전문의로 활동하다가 1926년 의사 아내 메리언 버텀리와 함께 조선으로 왔다. 해주구세병원 원장과 운산금광 담당의사를 맡아 환자들을 진료하는 한편 의창학교 교장도 겸했다.
셔우드는 1928년 최초의 결핵 전문 요양원인 해주구세요양원을 세웠다. 결핵 퇴치 사업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1932년 12월 국내 최초로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했다. 박에스더와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1938년에는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화진포에 선교사 별장을 지었다. 1948년 김일성 일가가 묵은 적이 있어 김일성 별장으로 흔히 불리는데, 셔우드 홀 가족의 발자취가 전시돼 있다.
▲ 국내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 셔우드 홀이 1932년 12월 3일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행한 크리스마스 실.
ⓒ 대한결핵협회
셔우드는 1941년 간첩 혐의로 일제에 체포된 뒤 5000엔 벌금형을 받고 추방됐다. 1963년 은퇴할 때까지 인도에서 결핵 퇴치에 헌신했으며 1991년 4월 5일 미국 리치먼드에서 9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1984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고, 대한결핵협회는 1993년 탄생 100주년을 맞아 양화진 묘소에 공적비를 세웠다.
로제타의 손에서 탄생한 '최초'는 한두 개가 아니다. 여자의학강습소, 맹아학교, 소아과 병동, 한글점자, 여의사, 특수교육 교사 등 모두 값진 것이다. 크리스마스 실 등 가족으로 넓히면 더 많다. 로제타 부부와 셔우드 부부가 2대에 걸쳐 이 땅에서 봉사한 기간은 60년에 이른다.
3월 24일은 제45회 세계 결핵의 날이자 제16회 결핵 예방의 날이다. 아직도 결핵에 신음하는 환자가 적지 않다. 이날은 결핵 예방과 치료에 관심을 기울이는 날이면서 로제타 셔우드 홀 가족의 헌신을 기리는 날이다.
▲ 로제타 셔우드 홀 가족 묘역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윌리엄과 로제타 홀 부부, 셔우드와 메리언 홀 부부, 셔우드의 여동생 이디스, 셔우드의 딸 프랭크 6명이 잠들어 있다. 묘비 왼쪽은 대한결핵협회가 1993년 셔우드 홀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세운 공적비.
ⓒ 이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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