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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슬옹 기자]
▲ 랴오닝성 박물관 전경 (왼쪽부터 권오향, 김슬옹, 장리메이)
ⓒ 김슬옹
답사 이틀째인 3월 5일 아침, 우리는 랴오닝성 선양(瀋陽) 혼난구(浑南区)에 자리한 랴오닝성 박물관[遼 골드몽릴게임 寧省博物館]으로 향했다. 신숙주·성삼문·손수산 일행이 황찬을 만나러 온 1445년 무렵, 훈민정음(혜레본) 반포를 앞두고 두 학자는 세종의 명을 받아 랴오둥(요동) 땅 유배지의 황찬을 찾아가 음운에 대해 묻고 토론했다.
이때가 황찬은 한국 나이 33세, 신숙주 28세, 성삼문 27세였다. 580년이 야마토게임하기 지난 지금, 나는 권오향(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겸임 교수), ·장리메이(동시통역사, 중국 한국어 교사)와 함께 셋이서 그 길을 거슬러 오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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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나라 시기 랴오닝성 사진
ⓒ 랴오닝성박물관
명대관(明代館)에서 황찬의 시대를 읽다
손오공게임 랴오닝성 박물관 앞에서 우리는 먼저 기념 사진부터 찍었다. 훈민정음 관련 답사인 만큼 한국에서 가져온 훈민정음 해례본 병풍 책(마리북스)을 들고 찍었다. 내가 해례본에서 고른 명문장 10점을 청농 문관효 서예가가 써서 만든 미니 병풍이다.
전시 관람에 앞서 '랴오닝, 랴오양, 랴오둥'이란 지명이 몹시 헷갈린다고 했더니 중국통인 권오향 박 릴게임 사가 명쾌하게 정리해 주었다. '랴오닝성(성 전체) → 랴오양시(그 안의 역사도시) → 랴오둥(강 동쪽이라는 지리·역사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박물관에서 랴오둥도사(遼東都司) 관련 자료와 지방지를 열람하는 것, 그리고 황찬이 살았던 15세기 랴오양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관에 들어서자 권오향 박사가 먼저 명대관으로 발길을 이끌었다. 황찬이 랴오둥에 머문 시기가 1445년이니, 명나라 중기 랴오둥의 흐름을 짚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명대관 전시관은 조선 사신들의 랴오둥 왕래를 비교적 상세히 다루고 있었다. 신숙주나 성삼문의 이름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선 사신이라면 누구든 이 땅을 거쳐 갔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그분들의 발자국이 여기 어딘가에 겹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권오향 박사는 황찬의 랴오둥 내 위치에 대해 중요한 가설을 제기했다. 황찬이 유배 중이었다 해도 랴오둥도사 지휘부 안에서 일정한 관료 역할—위(衛)—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조선 학자들을 여러 차례 만나고 글도 주고받은 것으로 보아 감옥식의 유배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1445년 4월 8일에 황찬이 '희현당(希賢堂)'이란 호를 신숙주에게 내려주고 쓴 서문에서 "사진사(賜進士) 출신 전 한림원 서길사(翰林院庶吉士) 승직랑 형부 주사(承直郞,刑部主事) 길수(吉水) 황찬(黃瓚) 씀"이라고 전 직책을 밝혔다. 한림원은 황제의 칙령을 다듬거나 역사 편찬, 기밀문서 등 각종 학문에 관련된 임무를 담당한 엘리트 집단으로, 과거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인재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황찬이 남긴 직책명에는 황찬이 최고 엘리트로 출발했다가 정치적으로 좌천되어 변방에 머물렀다는, 한 지식인의 굴곡진 삶 전체가 담겨 있다. 신숙주와 성삼문이 훈민정음 창제 후 해례본 집필 과정에서 황찬을 찾아간 것은 단순한 지방 관리가 아니라 명나라 최고 엘리트 출신의 음운학자였음을 이 서명이 웅변해 준다. 세종대왕이 조선의 최고 집현전 학사들을 파견할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전시를 돌다 보니 랴오둥의 역사가 우리 역사와 얼마나 깊이 얽혀 있는지를 새삼 실감했다. 한때 이 땅이 고구려의 영역이었고,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했다. 랴오둥은 중국의 땅이기 이전에, 한반도와 수천 년을 함께 숨 쉰 공간이었다.
마침 '요양도사성(遼陽都司城)'이라는 사진 자료가 있었다. 명나라 때 군사 행정 기관 도면과 사진이었다. 결국 이 사진들은 명나라 랴오둥도사(遼東都司)의 치소(治所), 즉 행정 수도였던 랴오양의 실제 성곽 모습으로 북문과 동문의 옛 사진이었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아 확인할 수 없었지만 1445년 무렵 신숙주·성삼문이 음운학자 황찬(黃瓚)을 만나기 위해 수차례 왕래했던 바로 그 성문들을 통과했을 것이다. 훈민정음 연구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현장 자료였다. 나는 금방 흑백 사진으로 빨려 들어갔다. 신숙주, 성삼문, 손수산 뒤를 내가 졸래졸래 따라가고 있었다.
조선 사신이 이동했던 길의 흔적을 찾아서
▲ 명나라 시기 말시장도
ⓒ 랴오닝성박물관
전시 중 뜻밖의 자료 하나가 눈길을 붙잡았다. 선양에 있는 말시장[馬市] 관련 기록이었다. 장리메이 통역사가 먼저 알아보았다.
"북쪽의 말들이 이 시장에 다 모여서 (말을) 사고 팔았어요. 사신들이 말을 바꿔 탔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마 이 말시장에서 바꿔 타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죠."
역참(驛站)이 사람의 숙박과 이동을 담당했다면, 말시장은 말이라는 동력을 공급하는 물류 거점이었다. 조선 사신들이 이 말시장에서 지친 말을 갈아타고 다음 역참으로 향했다면, 신숙주와 성삼문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 사신이 이동했던 길의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명대 랴오둥 지도 앞에서 장리메이 통역사는 사신의 이동 노선을 차분히 짚어 주었다. 압록강을 건너 랴오둥으로 진입한 뒤 라오닝을 거쳐 북경으로 이어지는 경로. 그 동선이 지도 위에 선명히 떠올랐다. 박물관 오전 일정은 황찬의 시대를 둘러싼 행정·교통·역사의 그물을 입체적으로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점심을 마치고 선양 남역(沈陽南驛)으로 향했다. 오후 1시 50분, D8080 편 고속열차가 플랫폼을 미끄러져 나갔다. 17분 뒤, 라오닝역이었다. 불과 17분. 그러나 이 짧은 이동이 품은 시간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라오닝은 고구려의 성을 품고 당·요·금·명이 차례로 통치했으며,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한 직후 첫 번째 수도로 삼은 도시다. 선양이 청의 미래를 향해 달려간 도시라면, 라오닝은 그 이전 랴오둥의 모든 역사를 켜켜이 쌓아 놓은 도시였다. 역을 나서자 랴오양 시를 흐르는 태자하(太子河) 강쪽에서 꽃샘추위인듯 매서운 바람이 불어왔다.
지원도 멈춰 선 자리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곧바로 백탑공원으로 향했다. 요나라 시기인 1189년에 세워진 13층 백탑은 70.4 미터 높이로 저녁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장리메이 통역사가 조용히 말했다.
"동북 지역에서 제일 높은 탑으로 유명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박지원이 떠올랐다. 그는 '열하일기'에서 "화려하고 웅장한 품이 요동벌과 맞설만하다.(2010. 리상호 역, 보리출판사)"라고 '요동백탑견문기'를 따로 남겼을 정도이다. 18세기 조선 최고의 지식인이 경이로움을 기록한 바로 그 탑 앞에 내가 서 있었다.
생각해 보면 박지원도, 신숙주도, 성삼문도, 랴오둥 땅을 지나며 이 탑을 보았을 것이다. 탑은 그들을 다 기억하고 있을까. 다만 아쉬운 것은 우리 사신들이 본 그대로의 탑은 아니라는 것이다. 1900년대에 러시아군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20세기 후반 단계적으로 복원되었다고 한다.
탑을 돌면서 나는 미리 준비해 간 신숙주와 성삼문이 주고 받았던 시를 읊조렸다. 이곳 어느 숙소에서 조선 쪽의 밤하늘을 바라보는 두 젊은이가 주고 받은 시였다. 신숙주 후손들이 엮은 <보한재집>에 실려 있다.
<신숙주 >
치·설·아·순의 음이 아직 정밀치 못한데 齒舌牙唇尙未精
중원에 쓸데없이 질문하러 가는구나 中原虛作問奇行
삼경에 새 달은 고향 꿈꾸게 하고 三更新月生鄕夢
한 침대 훈훈한 바람 나그네 마음 움직이네 一榻薰風動客情
먼지 이는 요동 하늘 아득히 멀었고 塵起遼天迷遠大
구름 걷힌 골령엔 푸른빛이 드러난다 雲收骨嶺露餘靑
소매 안 여러 공의 지은 시 때때로 내어 보며 袖中時見諸公子
되는 대로 읊어보니 이별 시름 솟아난다 信口吟來別恨生
<성삼문>
나의 학문이 그대처럼 정밀치 못해 부끄러운데 慙余學未似君精
요양의 만리 길을 서로 같이 동행하네 同作遼陽萬里行
침대 위 오랑캐 장사치 우리와 무릎 같이하고 榻上賈胡連我膝
하늘 끝 나그네 인정을 애석해 하네 天涯遠客惜人情
꿈속에서 가는 고향 참으로 가는 것 못 되고 夢中鄕國非眞到
봄 지난 동산 숲은 푸르기만 하구나 春後園林只是靑
시구마다 짓는 것이 모두 백설이라 句句吟成皆白雪
화답하려 하니 내 어찌 수심을 면할쏘냐 和來能免百愁生
580년 전 두 젊은이의 마음이 내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절로 시가 우러나왔다.
〈라오녕에서, 580년 뒤에〉
— 보한재·매죽헌의 시에 화답하며 _김슬옹
아설순치후 그 소리 이제 밝혀졌는데 牙舌脣齒喉今已明
오백팔십 해 뒤에 셋이 함께 이 길 걷네 五百八十年後三人行
백탑 아래 두 분 시 소리 내어 읽으니 白塔下讀兩公詩
태자하 강바람이 나그네 가슴 적시네 太子河風濕客情
요동 하늘 그날 달은 오늘도 같은 달을 遼天當日月今同月
훈민정음 한자음에 닿으니 더욱 푸르네 正音漢字相應靑
세종의 뜻 이 땅에서 다시 한 번 새기며 世宗之志此地銘
한자음 풀어내는 이 길에 수심도 기쁨이네 解音之路愁亦生
(한문은 내 시를 중국인 장리메이 통역사가 번역해 준 것임을 밝혀둔다.)
보한재집에는 신숙주가 황찬에게 준 시도 전한다.
선생의 넓고 깊은 학문, 다 헤아리기 어렵지만 畢境難窺學海深
부족한 저의 의혹, 조금씩 풀어주시는구려. 稍令愚惑祛胸襟
세종 임금 부름 받아 돌아갈 날이 머지않으니 從天宣召無多日
봉황 같은 분(황찬)을 어찌 가시덤불 속에 오래 머물게 하리오. 肯使鸞凰滯棘林
중국 현지에 와보니 택배가 상상외로 발달되어 있었다. 한국으로 유학와 훈민정음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고, 황찬에 대한 가장 깊이 있는 연구 업적을 낸 바 있는 섭보매(聂宝梅, 바오메이) 중국인 교수는 강의 때문에 바빠 직접 라오양으로 오지는 못하고 내가 머물고 있는 호텔로 황찬에 대한 '길안시 황씨통사'를 보내주었다.
聂宝梅(2023)의 "黄瓒与朝鲜世宗朝的汉音质正(연변대학학보 56권 1호. 중국연변대학교. pp.76-86)"에 의하면 황찬이 비록 전통적 의미의 음운학자는 아니지만 명나라 최고 수준의 지식인으로서 세종대왕과 신숙주 등이 주도하는 '홍무정운역훈' 편찬에 충분히 기여할 학문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1446년에 발간된 훈민정음 해례본 366 문장 가운데 한자음 관련 문장만 30여 문장이 나온다. 황찬과의 토론이 해례본 집필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 백탑 공원 안 백탑(襄平은 ‘랴오양’의 옛 땅이름)
ⓒ 김슬옹
두 학자가 오간 반경
백탑에서 가까운 광우사로 발길을 옮겼다. 당나라 때 창건된 뒤 요·금·명·청대를 거쳐 중수를 거듭한 목조 사찰이다. 권오향 박사가 설명을 덧붙였다. 이 절은 러시아 폭격으로 소실되었다가 2000년에 복원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신숙주 일행이 이 근처에 머물렀다면 보았을 풍경의 형태가 복원을 통해 되살아난 것이라고. 터는 그대로이고, 배치도 그대로이며, 탑과 전각이 이루는 공간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복원은 없어진 것을 되돌리는 일이지만, 그 자리에 담긴 기억까지 지울 수는 없지 않은가.
광우사를 나오며 "만약 신숙주와 성삼문이 이 일대에 머물렀다면, 황찬이 머물던 장소와의 거리는 어느 정도였을까"라고 권오향 박사에게 물었다. 그는 "회동관이 이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설령 회동관에 묵지 않았더라도 이 사람들은 이 일대를 너무나 잘 알았을 거예요. 랴오둥도사도 바로 이 근처에 있으니, 그 숙소에서 황찬에게 여러 번 왔다 갔다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회동관(會同館)은 명나라 초기 설립된 외국 사신의 공식 숙소다. 랴오둥도사 관아는 바로 인근이었다. 백탑-광우사-회동관-랴오둥도사, 이 네 지점이 이루는 좁은 반경이 신숙주와 성삼문이 황찬을 만나러 오간 무대였을 것이다.
그런데 권오향 박사는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갔다. 두 사람은 그때 공식 사신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황찬을 만나기 위해 특별히 온 것이기에, 사신 자격으로 회동관에 묵었는지조차 확인하기 어렵다고 했다.
지명 속의 역사
하루를 마무리하며 권오향 박사가 지명 이야기를 꺼냈다. 선양의 옛 이름이 양평(襄平)이었다는 것, 그리고 나당 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당나라가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했다는 것을 지역 박불관 전시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랴오둥의 지명 하나하나가 한반도의 역사와 실로 깊이 얽혀 있다. 양평이 선양이 되고, 평양에 안동도호부가 설치되고, 그 위에 명나라 랴오둥도사가 들어서고, 그 안에서 황찬이 유배되어 신숙주·성삼문을 만난 것이다.
이틀째 일정을 마치며
태자하 강변으로 저녁이 내렸다. 강물은 580년 전과 같은 속도로 흐르고 있었을 것이고 신숙주와 성삼문, 손수산도, 그리고 황찬도 어느 저녁, 이 강가에 섰을 것이다. 이틀 째 답사에서 우리가 확인한 것은 유물이나 문서가 아니라 공간이었다. 그들이 숨 쉬었을 공간의 냄새, 방향, 거리 등을 몸으로 익힌 하루였다.
내일은 라오양 도서관을 찾아가 지방지를 직접 열람할 예정이다. 황찬이 머물렀던 장소를 지도 위의 한 점으로 좁혀 보는 작업이 기다리고 있다. 그 점이 선이 되고, 선이 이야기가 될 때 훈민정음 반포의 숨겨진 현장이 비로소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랴오닝성 박물관 전경 (왼쪽부터 권오향, 김슬옹, 장리메이)
ⓒ 김슬옹
답사 이틀째인 3월 5일 아침, 우리는 랴오닝성 선양(瀋陽) 혼난구(浑南区)에 자리한 랴오닝성 박물관[遼 골드몽릴게임 寧省博物館]으로 향했다. 신숙주·성삼문·손수산 일행이 황찬을 만나러 온 1445년 무렵, 훈민정음(혜레본) 반포를 앞두고 두 학자는 세종의 명을 받아 랴오둥(요동) 땅 유배지의 황찬을 찾아가 음운에 대해 묻고 토론했다.
이때가 황찬은 한국 나이 33세, 신숙주 28세, 성삼문 27세였다. 580년이 야마토게임하기 지난 지금, 나는 권오향(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겸임 교수), ·장리메이(동시통역사, 중국 한국어 교사)와 함께 셋이서 그 길을 거슬러 오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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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나라 시기 랴오닝성 사진
ⓒ 랴오닝성박물관
명대관(明代館)에서 황찬의 시대를 읽다
손오공게임 랴오닝성 박물관 앞에서 우리는 먼저 기념 사진부터 찍었다. 훈민정음 관련 답사인 만큼 한국에서 가져온 훈민정음 해례본 병풍 책(마리북스)을 들고 찍었다. 내가 해례본에서 고른 명문장 10점을 청농 문관효 서예가가 써서 만든 미니 병풍이다.
전시 관람에 앞서 '랴오닝, 랴오양, 랴오둥'이란 지명이 몹시 헷갈린다고 했더니 중국통인 권오향 박 릴게임 사가 명쾌하게 정리해 주었다. '랴오닝성(성 전체) → 랴오양시(그 안의 역사도시) → 랴오둥(강 동쪽이라는 지리·역사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박물관에서 랴오둥도사(遼東都司) 관련 자료와 지방지를 열람하는 것, 그리고 황찬이 살았던 15세기 랴오양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관에 들어서자 권오향 박사가 먼저 명대관으로 발길을 이끌었다. 황찬이 랴오둥에 머문 시기가 1445년이니, 명나라 중기 랴오둥의 흐름을 짚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명대관 전시관은 조선 사신들의 랴오둥 왕래를 비교적 상세히 다루고 있었다. 신숙주나 성삼문의 이름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선 사신이라면 누구든 이 땅을 거쳐 갔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그분들의 발자국이 여기 어딘가에 겹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권오향 박사는 황찬의 랴오둥 내 위치에 대해 중요한 가설을 제기했다. 황찬이 유배 중이었다 해도 랴오둥도사 지휘부 안에서 일정한 관료 역할—위(衛)—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조선 학자들을 여러 차례 만나고 글도 주고받은 것으로 보아 감옥식의 유배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1445년 4월 8일에 황찬이 '희현당(希賢堂)'이란 호를 신숙주에게 내려주고 쓴 서문에서 "사진사(賜進士) 출신 전 한림원 서길사(翰林院庶吉士) 승직랑 형부 주사(承直郞,刑部主事) 길수(吉水) 황찬(黃瓚) 씀"이라고 전 직책을 밝혔다. 한림원은 황제의 칙령을 다듬거나 역사 편찬, 기밀문서 등 각종 학문에 관련된 임무를 담당한 엘리트 집단으로, 과거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인재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황찬이 남긴 직책명에는 황찬이 최고 엘리트로 출발했다가 정치적으로 좌천되어 변방에 머물렀다는, 한 지식인의 굴곡진 삶 전체가 담겨 있다. 신숙주와 성삼문이 훈민정음 창제 후 해례본 집필 과정에서 황찬을 찾아간 것은 단순한 지방 관리가 아니라 명나라 최고 엘리트 출신의 음운학자였음을 이 서명이 웅변해 준다. 세종대왕이 조선의 최고 집현전 학사들을 파견할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전시를 돌다 보니 랴오둥의 역사가 우리 역사와 얼마나 깊이 얽혀 있는지를 새삼 실감했다. 한때 이 땅이 고구려의 영역이었고,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했다. 랴오둥은 중국의 땅이기 이전에, 한반도와 수천 년을 함께 숨 쉰 공간이었다.
마침 '요양도사성(遼陽都司城)'이라는 사진 자료가 있었다. 명나라 때 군사 행정 기관 도면과 사진이었다. 결국 이 사진들은 명나라 랴오둥도사(遼東都司)의 치소(治所), 즉 행정 수도였던 랴오양의 실제 성곽 모습으로 북문과 동문의 옛 사진이었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아 확인할 수 없었지만 1445년 무렵 신숙주·성삼문이 음운학자 황찬(黃瓚)을 만나기 위해 수차례 왕래했던 바로 그 성문들을 통과했을 것이다. 훈민정음 연구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현장 자료였다. 나는 금방 흑백 사진으로 빨려 들어갔다. 신숙주, 성삼문, 손수산 뒤를 내가 졸래졸래 따라가고 있었다.
조선 사신이 이동했던 길의 흔적을 찾아서
▲ 명나라 시기 말시장도
ⓒ 랴오닝성박물관
전시 중 뜻밖의 자료 하나가 눈길을 붙잡았다. 선양에 있는 말시장[馬市] 관련 기록이었다. 장리메이 통역사가 먼저 알아보았다.
"북쪽의 말들이 이 시장에 다 모여서 (말을) 사고 팔았어요. 사신들이 말을 바꿔 탔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마 이 말시장에서 바꿔 타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죠."
역참(驛站)이 사람의 숙박과 이동을 담당했다면, 말시장은 말이라는 동력을 공급하는 물류 거점이었다. 조선 사신들이 이 말시장에서 지친 말을 갈아타고 다음 역참으로 향했다면, 신숙주와 성삼문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 사신이 이동했던 길의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명대 랴오둥 지도 앞에서 장리메이 통역사는 사신의 이동 노선을 차분히 짚어 주었다. 압록강을 건너 랴오둥으로 진입한 뒤 라오닝을 거쳐 북경으로 이어지는 경로. 그 동선이 지도 위에 선명히 떠올랐다. 박물관 오전 일정은 황찬의 시대를 둘러싼 행정·교통·역사의 그물을 입체적으로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점심을 마치고 선양 남역(沈陽南驛)으로 향했다. 오후 1시 50분, D8080 편 고속열차가 플랫폼을 미끄러져 나갔다. 17분 뒤, 라오닝역이었다. 불과 17분. 그러나 이 짧은 이동이 품은 시간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라오닝은 고구려의 성을 품고 당·요·금·명이 차례로 통치했으며,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한 직후 첫 번째 수도로 삼은 도시다. 선양이 청의 미래를 향해 달려간 도시라면, 라오닝은 그 이전 랴오둥의 모든 역사를 켜켜이 쌓아 놓은 도시였다. 역을 나서자 랴오양 시를 흐르는 태자하(太子河) 강쪽에서 꽃샘추위인듯 매서운 바람이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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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곧바로 백탑공원으로 향했다. 요나라 시기인 1189년에 세워진 13층 백탑은 70.4 미터 높이로 저녁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장리메이 통역사가 조용히 말했다.
"동북 지역에서 제일 높은 탑으로 유명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박지원이 떠올랐다. 그는 '열하일기'에서 "화려하고 웅장한 품이 요동벌과 맞설만하다.(2010. 리상호 역, 보리출판사)"라고 '요동백탑견문기'를 따로 남겼을 정도이다. 18세기 조선 최고의 지식인이 경이로움을 기록한 바로 그 탑 앞에 내가 서 있었다.
생각해 보면 박지원도, 신숙주도, 성삼문도, 랴오둥 땅을 지나며 이 탑을 보았을 것이다. 탑은 그들을 다 기억하고 있을까. 다만 아쉬운 것은 우리 사신들이 본 그대로의 탑은 아니라는 것이다. 1900년대에 러시아군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20세기 후반 단계적으로 복원되었다고 한다.
탑을 돌면서 나는 미리 준비해 간 신숙주와 성삼문이 주고 받았던 시를 읊조렸다. 이곳 어느 숙소에서 조선 쪽의 밤하늘을 바라보는 두 젊은이가 주고 받은 시였다. 신숙주 후손들이 엮은 <보한재집>에 실려 있다.
<신숙주 >
치·설·아·순의 음이 아직 정밀치 못한데 齒舌牙唇尙未精
중원에 쓸데없이 질문하러 가는구나 中原虛作問奇行
삼경에 새 달은 고향 꿈꾸게 하고 三更新月生鄕夢
한 침대 훈훈한 바람 나그네 마음 움직이네 一榻薰風動客情
먼지 이는 요동 하늘 아득히 멀었고 塵起遼天迷遠大
구름 걷힌 골령엔 푸른빛이 드러난다 雲收骨嶺露餘靑
소매 안 여러 공의 지은 시 때때로 내어 보며 袖中時見諸公子
되는 대로 읊어보니 이별 시름 솟아난다 信口吟來別恨生
<성삼문>
나의 학문이 그대처럼 정밀치 못해 부끄러운데 慙余學未似君精
요양의 만리 길을 서로 같이 동행하네 同作遼陽萬里行
침대 위 오랑캐 장사치 우리와 무릎 같이하고 榻上賈胡連我膝
하늘 끝 나그네 인정을 애석해 하네 天涯遠客惜人情
꿈속에서 가는 고향 참으로 가는 것 못 되고 夢中鄕國非眞到
봄 지난 동산 숲은 푸르기만 하구나 春後園林只是靑
시구마다 짓는 것이 모두 백설이라 句句吟成皆白雪
화답하려 하니 내 어찌 수심을 면할쏘냐 和來能免百愁生
580년 전 두 젊은이의 마음이 내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절로 시가 우러나왔다.
〈라오녕에서, 580년 뒤에〉
— 보한재·매죽헌의 시에 화답하며 _김슬옹
아설순치후 그 소리 이제 밝혀졌는데 牙舌脣齒喉今已明
오백팔십 해 뒤에 셋이 함께 이 길 걷네 五百八十年後三人行
백탑 아래 두 분 시 소리 내어 읽으니 白塔下讀兩公詩
태자하 강바람이 나그네 가슴 적시네 太子河風濕客情
요동 하늘 그날 달은 오늘도 같은 달을 遼天當日月今同月
훈민정음 한자음에 닿으니 더욱 푸르네 正音漢字相應靑
세종의 뜻 이 땅에서 다시 한 번 새기며 世宗之志此地銘
한자음 풀어내는 이 길에 수심도 기쁨이네 解音之路愁亦生
(한문은 내 시를 중국인 장리메이 통역사가 번역해 준 것임을 밝혀둔다.)
보한재집에는 신숙주가 황찬에게 준 시도 전한다.
선생의 넓고 깊은 학문, 다 헤아리기 어렵지만 畢境難窺學海深
부족한 저의 의혹, 조금씩 풀어주시는구려. 稍令愚惑祛胸襟
세종 임금 부름 받아 돌아갈 날이 머지않으니 從天宣召無多日
봉황 같은 분(황찬)을 어찌 가시덤불 속에 오래 머물게 하리오. 肯使鸞凰滯棘林
중국 현지에 와보니 택배가 상상외로 발달되어 있었다. 한국으로 유학와 훈민정음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고, 황찬에 대한 가장 깊이 있는 연구 업적을 낸 바 있는 섭보매(聂宝梅, 바오메이) 중국인 교수는 강의 때문에 바빠 직접 라오양으로 오지는 못하고 내가 머물고 있는 호텔로 황찬에 대한 '길안시 황씨통사'를 보내주었다.
聂宝梅(2023)의 "黄瓒与朝鲜世宗朝的汉音质正(연변대학학보 56권 1호. 중국연변대학교. pp.76-86)"에 의하면 황찬이 비록 전통적 의미의 음운학자는 아니지만 명나라 최고 수준의 지식인으로서 세종대왕과 신숙주 등이 주도하는 '홍무정운역훈' 편찬에 충분히 기여할 학문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1446년에 발간된 훈민정음 해례본 366 문장 가운데 한자음 관련 문장만 30여 문장이 나온다. 황찬과의 토론이 해례본 집필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 백탑 공원 안 백탑(襄平은 ‘랴오양’의 옛 땅이름)
ⓒ 김슬옹
두 학자가 오간 반경
백탑에서 가까운 광우사로 발길을 옮겼다. 당나라 때 창건된 뒤 요·금·명·청대를 거쳐 중수를 거듭한 목조 사찰이다. 권오향 박사가 설명을 덧붙였다. 이 절은 러시아 폭격으로 소실되었다가 2000년에 복원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신숙주 일행이 이 근처에 머물렀다면 보았을 풍경의 형태가 복원을 통해 되살아난 것이라고. 터는 그대로이고, 배치도 그대로이며, 탑과 전각이 이루는 공간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복원은 없어진 것을 되돌리는 일이지만, 그 자리에 담긴 기억까지 지울 수는 없지 않은가.
광우사를 나오며 "만약 신숙주와 성삼문이 이 일대에 머물렀다면, 황찬이 머물던 장소와의 거리는 어느 정도였을까"라고 권오향 박사에게 물었다. 그는 "회동관이 이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설령 회동관에 묵지 않았더라도 이 사람들은 이 일대를 너무나 잘 알았을 거예요. 랴오둥도사도 바로 이 근처에 있으니, 그 숙소에서 황찬에게 여러 번 왔다 갔다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회동관(會同館)은 명나라 초기 설립된 외국 사신의 공식 숙소다. 랴오둥도사 관아는 바로 인근이었다. 백탑-광우사-회동관-랴오둥도사, 이 네 지점이 이루는 좁은 반경이 신숙주와 성삼문이 황찬을 만나러 오간 무대였을 것이다.
그런데 권오향 박사는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갔다. 두 사람은 그때 공식 사신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황찬을 만나기 위해 특별히 온 것이기에, 사신 자격으로 회동관에 묵었는지조차 확인하기 어렵다고 했다.
지명 속의 역사
하루를 마무리하며 권오향 박사가 지명 이야기를 꺼냈다. 선양의 옛 이름이 양평(襄平)이었다는 것, 그리고 나당 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당나라가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했다는 것을 지역 박불관 전시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랴오둥의 지명 하나하나가 한반도의 역사와 실로 깊이 얽혀 있다. 양평이 선양이 되고, 평양에 안동도호부가 설치되고, 그 위에 명나라 랴오둥도사가 들어서고, 그 안에서 황찬이 유배되어 신숙주·성삼문을 만난 것이다.
이틀째 일정을 마치며
태자하 강변으로 저녁이 내렸다. 강물은 580년 전과 같은 속도로 흐르고 있었을 것이고 신숙주와 성삼문, 손수산도, 그리고 황찬도 어느 저녁, 이 강가에 섰을 것이다. 이틀 째 답사에서 우리가 확인한 것은 유물이나 문서가 아니라 공간이었다. 그들이 숨 쉬었을 공간의 냄새, 방향, 거리 등을 몸으로 익힌 하루였다.
내일은 라오양 도서관을 찾아가 지방지를 직접 열람할 예정이다. 황찬이 머물렀던 장소를 지도 위의 한 점으로 좁혀 보는 작업이 기다리고 있다. 그 점이 선이 되고, 선이 이야기가 될 때 훈민정음 반포의 숨겨진 현장이 비로소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덧붙이는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