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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발할까봐 내며 걸리기김영헌 씨와 가족들이 지난해 12월 태국 여행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김씨 가족은 사진을 찍을 때 ‘우리가족 파이팅’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영기 기자
[헤럴드경제(무안)=이영기·정주원 기자] ‘12·29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무안공항 참사)’가 179명의 목숨을 앗아간 지 1년. 여행에서 돌아오지 않는 가족을 기다리는 이들은 여전히 무안국제공항의 텐트촌을 지키고 있다. 지난 1년간 참사 원인 규명을 촉구하기 위해 텐트촌에 살고 있는 유가족들은 입을 모아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했다.
지난 22~23일 헤럴드경제가 바다이야기온라인 찾은 전남 무안국제공항은 쓸쓸한 분위기만 감돌았다. 폐쇄된 공항은 고요함을 넘어 적막하기까지 했다. 가끔 유가족들의 작은 대화 소리만 들렸다.
바깥세상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들뜬 분위기를 내고 있었지만, 무안공항의 시간은 지난해 12월 29일에서 더 이상 흐르지 않고 있었다.
헤럴드경제는 참사 1년 이후 여전히 고통의 사아다쿨 나날을 겪고 있는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차례로 전한다.
가족과 태국에서 작별…홀로 남은 아빠 “이제 다 해줄 수 있었는데”
“요즘 눈물이 너무 나요. 마스크라도 좀 써야 덜해요.”
이날 텐트촌에서 기자와 만난 김영헌(53) 씨는 쓰고 있던 마스크를 만지며 이같이 말 릴게임바다이야기 했다. 김씨는 참사로 아내 김정희 씨와 20대였던 두 아들 예찬·유찬 씨를 잃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 말 가족과 함께 태국을 여행했다. 젊어서 고생했던 김영헌 씨 부부가 여유를 찾고 온 가족이 함께 떠난 두 번째 여행이었다. 2024년 2월 떠났던 여행 이후 ‘또 가자’라는 이름의 가족모임통장에 돈을 모아 떠난 여행은 마지막 여행이 됐 바다이야기디시 다.
지난 23일 전남 무안국제공항 2층의 ‘12·29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유가족 텐트. 무안=이영기 기자
인도 현지 법인장을 맡고 있던 김씨는 태국에서 가족과 만났고, 헤어졌다. 김씨는 가족과 헤어질 바다이야기무료 때 한명, 한명 안으며 “아빠 두 달 뒤면 휴가 나가니깐 그때까지 잘하고 있어”라고 인사했다. 마지막 인사였다.
가족과의 마지막 대화는 출발 대기 전 받은 가족들의 메시지였다. 여행 중 장염에 걸린 김씨에게 큰아들 예찬 씨는 ‘도착해서 괜찮아도 병원 가셔요잉’이라고, 아내 정희 씨는 ‘아프면 속상해. 같이 집에 가는 것도 아니고ㅠ. 영양제도 꼭 챙겨먹어잉’이라며 김씨를 걱정했다. 김씨는 메시지를 읽은 후 비행기 탑승을 위해 휴대전화 전원을 껐다.
김씨와 가족들이 태국에서 헤어진 후 주고받은 메시지. 무안=이영기 기자
인도에 도착해 짐을 풀기도 전에 접한 비보에 김씨는 꼬박 하루 걸려 무안공항으로 왔다. 김씨는 그렇게 혼자가 됐다.
세 가족 장례를 치른 후에야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집에서 도저히 갈 수가 없어 호텔에서 5일 정도 지냈다. 그 사이에 형제들이 몰래 가족들 유품을 다 비워버렸다”며 “집에 가보니 가족들 냄새가 묻어있는 화장품이나 옷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는 원망스러웠다”고 회상했다.
가족 생각에 살던 집도 처분해야 했다. 김씨는 “그 동네에서만 한 15년 정도 살았어요. 근데 주변 음식점을 하나도 못 가겠더라”며 “아파트 놀이터만 봐도 작은 애랑 놀았던 기억이 사무쳐서 도저히 살 수가 없었어요”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온갖 고생 끝에 얻어낸 인도 법인장 자리도 내놨다. 김씨는 “아내가 한국에서 고생했으니 이제 사모님처럼 해주고 싶었다”며 “인도로 데려와서 원하는 건 다 해줄 수 있었는데…이제 악착같이 일하는 게 의미가 없더라. 회사를 나왔다”고 말했다.
가족의 흔적을 지우는 일도 직접 해야 했다. 하나씩 처리할 때마다 매번 무너져 일주일이면 끝낼 일을 3개월 동안 나눠서 했다. 그는 “아이들 흔적을 다 지워줘야 하니깐 은행이나 관공서를 돌았거든요. 처리하려면 사망 진단서하고 가족관계 증명서가 필요해요”라며 “가족관계 증명서를 떼면 이름 밑에 ‘사망’이라고 딱 적혀있어요. 그걸 꺼낼 때마다 그냥 다 무너지는 거예요”라고 회상했다.
김씨는 전남경찰청에 참사 관련자 수사를 촉구하는 1인 시위에 나서고 있다. 무안=이영기 기자
이어 그는“오늘은 어디, 어디 가서 처리해야겠다고 계획을 세워도 서류만 꺼내면 무너지니깐 다 정리하는 데 석 달이 걸렸어요”라고 말했다.
이제 그는 가족을 앗아간 참사 진상 규명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김씨는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래핑을 씌운 트럭을 몰며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전남경찰청의 신속한 수사를 촉구하기 위해 1인 시위도 나서고 있다.
김씨는 “참사 후 1년이 지났는데 전남경찰청은 어떤 결론도 없다”며 “계속 입건만 하고 있는데, 어떤 수사가 이뤄지는지 알 수도 없다. 유가족들은 전남경찰청이 적극적으로 수사해 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무안공항 참사를 잊지 말아 달라는 당부도 했다. 김씨는 “공항에서 가까운 광주 사람들도 아직 공항에 유가족이 있다는 걸 모른다. 해결된 줄 아는 사람도 있다”며 “이제 1년이 됐는데 밝혀진 게 있나. 고립된 유족과 참사를 잊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냐는 질문에 김씨는 “‘얘들아, 아빠답게 행동하려고 매일 당당하게 하고 있다. 아빠는 여기서 미친 듯이 소리 지르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꿈속 딸의 전화 끊지 못하는 엄마…“널 보고 싶어 아빠가 갔어”
“남편은 딸의 죽음에 대해 어떤 설명도 듣지 못한 채 떠났어요. 그게 가장 마음에 남아요”
무안공항에서 1시간 거리인 나주시의 작업실에서 만난 임정임 씨는 이같이 말하며 참사 후 1년을 회상했다. 참사로 딸 김애린 KBS 광주방송총국 기자를 잃은 임씨 곁을 최근 남편 김경학 씨도 갑작스럽게 떠났다. 김씨는 참사 진상규명을 위해 가장 앞에 섰던 애린씨의 아버지기도 하다.
김애린 기자의 보도 화면. 임정임씨는 딸이 뉴스에 나올 때 촬영한 사진을 모아 갖고 있었다. [임정임 씨 제공]
임씨는 “애린이가 살아 있었다면 엄마에게 ‘조금만 더 버텨’라고 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밤마다 딸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휴대전화 녹음을 켜려다 다시 내려놓고, 소파에 누워 딸에게서 걸려 온 꿈속 전화를 붙잡고 놓지 않으려 애쓴다.
임씨는 딸과 남편에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딸과 남편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임 씨는 “애린아, 사고 난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네. 아빠도 너를 보고 싶어서 엄마보다 먼저 네 곁으로 갔잖아”라며 “엄마는 남아서 왜 이런 참사가 생겼는지, 재발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깊이 생각하고 있고 항상 함께한다고 믿을게. 너무 사랑해. 보고 싶어”라고 말했다.
남편에게는 ‘몽피’라는 호를 불러 마음을 전했다. 임씨는 “몽피 당신의 지혜를 떠올리며, 당신이 못다 한 진상규명과 사회의 불합리함을 바로잡는 일을 내가 이어가 볼게”라고 했다. 그리고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간신히 입을 뗀 임씨는 “참사 이후의 내분과 갈등도 과정이라고 믿는다. 언젠가 진심은 통할 것”이라며 “남은 인생을, 다시는 이런 희생이 반복되지 않도록 쓰겠다. 늘 함께할게”라고 끝맺었다.
전남 나주시의 작업실에서 만난 임정임 씨. 임씨는 꿈속에서 걸려 온 딸의 전화를 끊지 못하는 일이 잦다고 했다. 무안=정주원 기자
재난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확인되지 않은 정보 유포나 피해자에 대한 비난을 삼가주세요. 재난을 겪은 뒤 심리적인 어려움이 있는 경우 ☎02-2204-0001(국가트라우마센터) 또는 1577-0199(정신건강위기 상담전화)로 연락하시면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 이 기사는 재난보도준칙을 준수하였습니다.
[헤럴드경제(무안)=이영기·정주원 기자] ‘12·29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무안공항 참사)’가 179명의 목숨을 앗아간 지 1년. 여행에서 돌아오지 않는 가족을 기다리는 이들은 여전히 무안국제공항의 텐트촌을 지키고 있다. 지난 1년간 참사 원인 규명을 촉구하기 위해 텐트촌에 살고 있는 유가족들은 입을 모아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했다.
지난 22~23일 헤럴드경제가 바다이야기온라인 찾은 전남 무안국제공항은 쓸쓸한 분위기만 감돌았다. 폐쇄된 공항은 고요함을 넘어 적막하기까지 했다. 가끔 유가족들의 작은 대화 소리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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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태국에서 작별…홀로 남은 아빠 “이제 다 해줄 수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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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지난해 12월 말 가족과 함께 태국을 여행했다. 젊어서 고생했던 김영헌 씨 부부가 여유를 찾고 온 가족이 함께 떠난 두 번째 여행이었다. 2024년 2월 떠났던 여행 이후 ‘또 가자’라는 이름의 가족모임통장에 돈을 모아 떠난 여행은 마지막 여행이 됐 바다이야기디시 다.
지난 23일 전남 무안국제공항 2층의 ‘12·29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유가족 텐트. 무안=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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