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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었다. 잠시 있었지. 제대로 이 회식자리면 얘기지.(시사저널=유홍철 호남본부 기자)
11일 오후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서 순천 시민운동가 고 장채열씨 하관식이 열리고 있다. ⓒ이갑성 전국농민회총연맹 부의장 제공
'전남 순천 시민사회의 큰별' 시민운동가 장채열(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 씨가 영면에 들었다.
고인의 유해는 11일 오후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됐다. 고인은 지난 9일 새벽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62세.
발인은 11일 오전 8시 빈소가 바다이야기디시 있는 성가롤로병원에서 엄수됐다. 이어 조례 호수공원 표지석 앞에서 노제가 진행됐으며 지난 10일에는 추모의 밤이 열렸다. 빈소를 찾은 많은 조문객들은 "큰 별이 졌다"고 애도했다.
장례는 '꿈꾸는 일꾼 장채열 민주시민장'으로 치러졌다. 장례위원장은 문경식 (전남진보연대 상임대표) 이학영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정금호 (전남시민사회단 사이다릴게임 체연대회의 상임대표) 양만열(전)순천쳥년회 회장) 최주원(전 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이 맡았다.
11일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서 열린 순천 시민운동가 고 장채열씨 하관식. ⓒ이갑성 전국농민회총연맹 부의장 제공
야마토무료게임동료들 중앙 무대 진출에…"권력의 꼬리를 밟고 다닌다" 일갈
장 이사장은 순천 시민운동의 뿌리이자 꿈꾸는 자치 일꾼으로 가장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시민운동가로 평가받는다. 특히 그는 1980년대 광주 5·18을 시작으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권력과 거리를 두고 늘 '현장'을 선택했다. 학생운동, 노동운동, 환경운동, 시민운동 등을 카카오야마토 아우르며 순천 시민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장 이사장은 자리에 욕심내지 않고 언제나 '작은 돌멩이 하나'로 남기를 바랐다. 참여정부 이후 지방분권이 화두로 떠오르자 지역에서도 중앙 무대로 진출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그럴 때마다 그는 "권력의 꼬리를 밟고 다닌다"며 "운동이 자리를 탐하는 순간, 그 운동은 죽는다"고 동료들에게 일갈했다 바다이야기무료머니 .
11일 오전, 고 장채열 동사연 이사장의 노제가 자신이 14년의 싸움 끝에 저수지를 호수공원으로 이뤄낸 순천 조례 호수공원에서 열리고 있다. ⓒ독자 제공
그의 청춘은 평탄하지 않았다. 고등학생 눈으로 1980년 5.18광주민주항쟁을 목격하면서다. 그 체험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그에게 진실이 억눌린 세상에서의 침묵은 죄였다.
장 이사장은 1963년 전남 고흥 대서면에서 여섯 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산수초등학교와 광주 동성중을 거쳐 전남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고등학생 신분으로 광주 5·18을 맞아 계엄 해제 시위에 동참했다.
1981년 전남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한 후 민속문화연구회(탈춤반)에서 활동했다. 1983년 5월 11일 전남대 도서관 옥상에서 '반파쇼 민주화 투쟁 학우의 외침'을 배포하며 시위를 주도했다. 이 일로 지명 수배를 당하고 8월 24일 학사 제적을 당했다.
이후 서울에서 노동 활동 중 같은 해 10월 12일 체포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으며 첫 번째 수감생활을 겪었다.
"광주를 넘어, 여수·순천의 현장으로"
1984년 출소 후 가장 낮은 곳, 노동 현장으로 내려갔다. 여수로 내려가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얼음공장, 럭키석유화학 협력회사등 노동현장에 투신하던 중 이듬해 여수에서 야학 활동 중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986년 12월 29일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고 두 번째 수감생활을 했다.
1987년 재출소 후 그는 권력의 중심이 아닌 순천을 삶의 터전, 운동의 기반으로 삼아 시민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순천민주청년회'를 창립하고 '순천승주민주단체협의회' 공동의장으로 시민운동의 지평을 열었다. 1989년에는 '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를 창립한다.
여순사건 증언 채록, 순천만 보전 운동, 14년의 싸움 끝에 이뤄낸 조례저수지 호수 공원화, 한얼답사회를 통한 문화유산 탐방, 지방자치 공론장 '순천포럼', 8년의 투쟁 끝에 전국 최초로 마사회 화상 경마장 입점 저지 등의 시민운동을 펴왔다.
도시재생을 위한 천막농성 대신 '천막 포럼'을 제안하며 대화와 토론의 시민정치를 실천했고, 로컬푸드 운동, LF아울렛, 코스트코 입점 저지 운동 등 생활 속 자치와 연대의 실천을 멈추지 않았다. 그에게 시민운동은 명예가 아니라 삶 그 자체였다.
장 이사장의 친구인 광주 시민사회 원로 김영집씨는 SNS에 올린 글에서 "장 이사장은 언제나 말보다 행동으로 앞서던 사람으로 그의 삶은 조용했지만 남긴 발자취는 크고 깊다"며 "출세를 마다했고, 자리보다 사람을, 권력보다 신의를 중히 여기며 권력에 흔들리지 않고 시민과 함께 현장을 지켰다"고 회고했다.
고 장채열(왼쪽 두번째) 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이 지난해 5월 헤이리 예술마을에서 '참 생태도시를 꿈꾸는 수세미'를 주제로 수세미 모종심기를 설명하고 있다. ⓒ시민 김준희씨 제공
순천 천연 수세미 완성품 ⓒ시민 김준희씨 제공
마지막까지 행했던 '수세미 보급운동'
장 이사장이 마지막까지 행했던 것은 '수세미' 보급운동이었다. 지난달 초, 수세미밭을 둘러본 것이 그의 마지막 외출이었다. 장 이사장은 생태공간으로서 순천을 꿈꾸며 수세미를 심어왔다.
강기정 광주시장은 자신의 SNS에 "다른 이들과는 달리 순천을 삶의 터전, 운동의 기반으로 선택해 순천만 갈대를 지켜내며 오늘의 생태도시 순천을 있게 한 주역이다"며 "마지막까지 그가 행했던 수세미보급운동을 기억하라며 영정 사진 앞에 놓여 있는 수세미 하나를 들고 광주로 향한다"고 적었다.
최주원 상임장례위원장은 조사를 통해 "고 장채열 동사연 이사장의 투쟁은 단순 구호가 아닌 현실적 실천이었다. 젊은 시절, 사회의 어려운 시기에 침묵하지 않고 권력의 부당함에 맞서 시민 권리를 위해 앞장 섰다"면서 "그의 삶은 명예를 쫒지 않고 소박함과 정의, 공동체에 대한 헌신으로 채워졌으며 그의 뜻은 계속 살아 숨쉴 것"이라고 말했다.
장례위원회는 "장 이사장의 대안적 시민운동을 위한 헌신과 실천 활동을 지속가능할 수 있도록 장례 이후 추모와 기념사업 등을 어어 가겠다"고 밝혔다.
11일 오후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서 순천 시민운동가 고 장채열씨 하관식이 열리고 있다. ⓒ이갑성 전국농민회총연맹 부의장 제공
'전남 순천 시민사회의 큰별' 시민운동가 장채열(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 씨가 영면에 들었다.
고인의 유해는 11일 오후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됐다. 고인은 지난 9일 새벽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62세.
발인은 11일 오전 8시 빈소가 바다이야기디시 있는 성가롤로병원에서 엄수됐다. 이어 조례 호수공원 표지석 앞에서 노제가 진행됐으며 지난 10일에는 추모의 밤이 열렸다. 빈소를 찾은 많은 조문객들은 "큰 별이 졌다"고 애도했다.
장례는 '꿈꾸는 일꾼 장채열 민주시민장'으로 치러졌다. 장례위원장은 문경식 (전남진보연대 상임대표) 이학영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정금호 (전남시민사회단 사이다릴게임 체연대회의 상임대표) 양만열(전)순천쳥년회 회장) 최주원(전 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이 맡았다.
11일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서 열린 순천 시민운동가 고 장채열씨 하관식. ⓒ이갑성 전국농민회총연맹 부의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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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이사장은 순천 시민운동의 뿌리이자 꿈꾸는 자치 일꾼으로 가장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시민운동가로 평가받는다. 특히 그는 1980년대 광주 5·18을 시작으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권력과 거리를 두고 늘 '현장'을 선택했다. 학생운동, 노동운동, 환경운동, 시민운동 등을 카카오야마토 아우르며 순천 시민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장 이사장은 자리에 욕심내지 않고 언제나 '작은 돌멩이 하나'로 남기를 바랐다. 참여정부 이후 지방분권이 화두로 떠오르자 지역에서도 중앙 무대로 진출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그럴 때마다 그는 "권력의 꼬리를 밟고 다닌다"며 "운동이 자리를 탐하는 순간, 그 운동은 죽는다"고 동료들에게 일갈했다 바다이야기무료머니 .
11일 오전, 고 장채열 동사연 이사장의 노제가 자신이 14년의 싸움 끝에 저수지를 호수공원으로 이뤄낸 순천 조례 호수공원에서 열리고 있다. ⓒ독자 제공
그의 청춘은 평탄하지 않았다. 고등학생 눈으로 1980년 5.18광주민주항쟁을 목격하면서다. 그 체험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그에게 진실이 억눌린 세상에서의 침묵은 죄였다.
장 이사장은 1963년 전남 고흥 대서면에서 여섯 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산수초등학교와 광주 동성중을 거쳐 전남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고등학생 신분으로 광주 5·18을 맞아 계엄 해제 시위에 동참했다.
1981년 전남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한 후 민속문화연구회(탈춤반)에서 활동했다. 1983년 5월 11일 전남대 도서관 옥상에서 '반파쇼 민주화 투쟁 학우의 외침'을 배포하며 시위를 주도했다. 이 일로 지명 수배를 당하고 8월 24일 학사 제적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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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를 넘어, 여수·순천의 현장으로"
1984년 출소 후 가장 낮은 곳, 노동 현장으로 내려갔다. 여수로 내려가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얼음공장, 럭키석유화학 협력회사등 노동현장에 투신하던 중 이듬해 여수에서 야학 활동 중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986년 12월 29일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고 두 번째 수감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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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증언 채록, 순천만 보전 운동, 14년의 싸움 끝에 이뤄낸 조례저수지 호수 공원화, 한얼답사회를 통한 문화유산 탐방, 지방자치 공론장 '순천포럼', 8년의 투쟁 끝에 전국 최초로 마사회 화상 경마장 입점 저지 등의 시민운동을 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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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이사장의 친구인 광주 시민사회 원로 김영집씨는 SNS에 올린 글에서 "장 이사장은 언제나 말보다 행동으로 앞서던 사람으로 그의 삶은 조용했지만 남긴 발자취는 크고 깊다"며 "출세를 마다했고, 자리보다 사람을, 권력보다 신의를 중히 여기며 권력에 흔들리지 않고 시민과 함께 현장을 지켰다"고 회고했다.
고 장채열(왼쪽 두번째) 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이 지난해 5월 헤이리 예술마을에서 '참 생태도시를 꿈꾸는 수세미'를 주제로 수세미 모종심기를 설명하고 있다. ⓒ시민 김준희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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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이사장이 마지막까지 행했던 것은 '수세미' 보급운동이었다. 지난달 초, 수세미밭을 둘러본 것이 그의 마지막 외출이었다. 장 이사장은 생태공간으로서 순천을 꿈꾸며 수세미를 심어왔다.
강기정 광주시장은 자신의 SNS에 "다른 이들과는 달리 순천을 삶의 터전, 운동의 기반으로 선택해 순천만 갈대를 지켜내며 오늘의 생태도시 순천을 있게 한 주역이다"며 "마지막까지 그가 행했던 수세미보급운동을 기억하라며 영정 사진 앞에 놓여 있는 수세미 하나를 들고 광주로 향한다"고 적었다.
최주원 상임장례위원장은 조사를 통해 "고 장채열 동사연 이사장의 투쟁은 단순 구호가 아닌 현실적 실천이었다. 젊은 시절, 사회의 어려운 시기에 침묵하지 않고 권력의 부당함에 맞서 시민 권리를 위해 앞장 섰다"면서 "그의 삶은 명예를 쫒지 않고 소박함과 정의, 공동체에 대한 헌신으로 채워졌으며 그의 뜻은 계속 살아 숨쉴 것"이라고 말했다.
장례위원회는 "장 이사장의 대안적 시민운동을 위한 헌신과 실천 활동을 지속가능할 수 있도록 장례 이후 추모와 기념사업 등을 어어 가겠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