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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랑거렸다. 엄청난 것 에게 그런 일 알지만"꼭 실패라고 적어 주세요. 팔순 기념 선인봉 등반은 실패했습니다."
1945년생 조성환씨는 지난 10월 26일 도봉산 선인봉 박쥐길을 팔순을 기념해 등반하려고 했다. 후배들과 함께 자일을 묶고 야심차게 바위에 붙었으나 쏟아지는 비로 인해서 하이라이트인 2피치 언더 크랙 하단에서 등반 중단을 선언했다. 그래서 그의 팔순 기념 선인봉 등반은 실패가 맞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실패를 자백할 필요는 없었다. 바로 일주일 전에 연습 삼아 했던 등반에서는 동일 루트를 훌륭하게 완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팔순에도 정정하게 선인봉을 오르는 등반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가 조 오션파라다이스사이트 금이라도 계산적인 사람이었다면 슬쩍 연습 등반을 했던 날을 팔순 기념 등반일로 정해 버리고 성공했다고 떵떵거렸을 터다. 실패한 걸 성공했다고 하는 것도 아니니 그게 흠 잡힐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에게 엄격했다. 타협은 없다. 그런 고집이 있어서 등반 인생 내내 한 산에만 천착했다. 그게 바로 도봉산이다. 그는 처음 등반에 입 황금성슬롯 문한 이래 60년 가까운 세월을 오로지 도봉산 등반에만 쏟아 붓고 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새로운 물결도 만들어내고 있다. 이제 바위는 더 못 한다고 진작 체념했던 시니어 등반가들이 암장으로 속속 돌아오고 있단다. 팔순 클라이머 조성환씨는 왜 이토록 등반에 빠져 있는 걸까?
릴게임하는법 박영래 화백이 팔순에도 선인봉에 오르는 조씨를 위해 축전을 그려줬다. 사진은 18년 전에 선인봉을 등반하다 촬영한 것이다.
자유로운 등반을 위해 산악회에 가입하지 않았다
"1945년 황해도에서 태어났어요. 세 살 때 서울로 피란을 왔죠. 그때부터 쭉 서울에 살고 있어요."
골드몽게임 그는 담담하게 자신의 인생사를 돌이켰다. 평범한 회사원으로 직장생활을 했고, 10년 정도 식당일을 했다가 장사가 잘 안 돼서 접고, 사업을 몇 개 더 운영하다가 대형운전면허를 취득하고 버스 기사로 일했다고 요약했다. 유치원 통원버스와 현대백화점 셔틀버스를 각각 운행하다가 백화점 셔틀버스 운행금지법이 발의된 이후로는 유치원에서만 일했다. 그는 카카오야마토 인생 이야기는 재미없다는 듯 간략히 줄이더니 산 얘기를 시작하니 눈이 번뜩인다.
"1967년에 제대했어요. 산은 그 다음해에 시작했죠. 고려대 산악부 암벽반인 친구가 있었거든요. 한 달 정도 친구를 따라 다녀보니 바로 예감이 들더라고요. 나, 산을 좋아하게 될 것 같다."
여러 산을 다니다 우연히 닿은 게 도봉산이다. 당시 도봉산에서 암벽등반을 하려면 할머니가게란 곳을 꼭 들러야 했다. 바위 좀 탄다는 사람들은 여기서 등반 파트너를 기다리고, 등반을 마친 후엔 같이 내려와 회포를 풀었다. 회원모집 공고를 보니 당시 히말라야 미답봉이었던 자누의 이름을 딴 산악회가 있었다.
"가입하고 보니 상황이 좀 우습게 됐어요. 초보자로서 암벽을 배우려고 갔는데 선등을 설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선등을 서게 됐어요. 표범이나 박쥐처럼 쉬운 코스들을 그렇게 등반했죠. 이 산악회 사람들하고 그렇게 10년을 어울렸어요."
인천 영종하늘도시 근린공원에서 만난 조성환씨가 인터뷰 도중 미소를 짓고 있다.
이후로는 선인봉 일대에서 바위를 잘한다는 소문이 붙은 사람을 찾아서 등반을 이어갔다. 오래된 월간산 과월호에서 심심찮게 접할 수 있던 묵직한 이름들이 연달아 나왔다. 중동산악회 조남일씨와 같이 선등과 후등을 번갈아 맡으며 등반을 했다. 타이탄산악회 조광열, 최철산씨 등과 어울리다가 다시 차덕규씨와 함께 등반했고 이후로는 요델산악회 안종섭씨 등과 같이 도봉산 이곳저곳을 누비며 등반을 했다. 그렇게 이 문단에 함축된 세월이 60년이다.
그런데 잠자코 들어보니 하나 특이한 점이 있다. 그는 처음 산에 입문할 때 몸담았던 자누 산악회를 제외하곤 어느 특정 산악회 회원하고 같이 등반을 했을지언정 그 산악회에 소속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할머니가게에서 친해진 등반가들과 같이 등반을 다녔을 뿐이었다.
"제 특징이 그겁니다. 구속받는 게 싫어요. 그냥 그렇게 다녔을 뿐이에요. 어느 단체에 소속되면 제 등반을 못 하거든요. 어디 정기 등반 간다고 하면 따라 가서 줄을 잡아 줘야 되고 그렇잖아요. 또 그렇게 조직이 되면 어떻습니까. 썩죠. 대한산악연맹이니 한국산악회니 이런 곳에서 정작 산과 바위는 등한시하고 정치질 하는 데 시간을 들이는 사람들도 숱하게 봤어요. 저는 그런 건 일절 사양입니다."
세월이 느껴지는 조씨의 등반장비.
유명 산악회에 가입하지 않은 건 생각지 못한 다른 이점을 만들었다. 산악회에 가입하면 그 안의 회원들하고만 등반했을 터지만 그는 이 산악회 저 산악회 사람들과 번갈아가며 등반했다. 그래서 지금은 도봉산 등반가 커뮤니티에서 가장 발이 넓은 사람 중 한 명이 됐다.
그렇게 발이 넓어도 그는 "유명해지는 건 천성에 맞지 않다"며 소위 '한 자리' 하는 걸 모두 거부했다고 했다. 오직 정통적인 등반, 자유스러우면서도 보수적인, 말하자면 등반 문화의 정수와 같은 삶을 살길 원했고, 그렇게 살았다. 그저 등반 자체를 즐기고, 산 자체에 빠져서 매몰된 채 살아가는 히피 클라이머처럼.
"옛날엔 암벽화도 없었던 시절이에요. 군화를 신고 등반했죠. 그래서 아주 제한적이었어요. 지금이야 가파른 바위에도 쩍쩍 달라붙는 신발이 있어서 평평한 슬랩도 쭉쭉 기어오를 수 있지만 그땐 다 미끄러졌죠. 이 때문에 보통 등반을 한다고 하면 크랙을 따라서 오르는 경우가 많았요."
선인봉 박쥐길도 대표적인 갈라진 틈을 따라 오르는 크랙 루트다. 그는 이 박쥐길만 여태껏 300번이나 완등했다고 전했다. 표범길도 마찬가지로 300번 정도, 그 외에는 도봉산 곳곳에 자잘한 다른 루트나 바위를 따라 올랐다고 했다. 그렇게 늘 오르던 루트를 막상 팔순 기념 등반이라고 못 박은 날짜에는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미련이 없다"고 했다.
지난 10월 도봉산 선인봉 박쥐길을 등반하고 있는 조씨. 사진 박경식.
사린다고 안전한 건 아냐…때론 과감해야
"연습 등반 때 오르기도 했고, 어쨌건 머릿속에 간단하고 단순하게 '팔순 기념으로 한 번 올라보자'는 식으로 도전했던 거라 딱히 의미 부여를 안 했기 때문에 별로 아쉬움은 없습니다. 어떤 프로젝트의 대상이었던 것도 아니고요. 사실 저는 더 등반하고 싶었는데 후배들이 너무 만류하는 통에 중단했죠. 그리고 좀 더 말하자면 이런 도전에 성공이니 정복이니 같은 개념을 두고 싶지 않아요. 제게 등반이란 일상입니다. 늘 바위를 올랐고, 그 날도 바위를 오르던 나날 중 하나였을 뿐이에요."
덧붙여 그렇게 오랫동안 계속 등반해 올 수 있었던 이유를 "순전히 운"으로 돌렸다. 마치 바위에 붙어 있으면 뒤에서 '너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다'라고 해주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런 속삭임이 들린 건 몇 번의 사고를 거친 후다.
팔순 기념 등반에 동행했던 요델산악회 박경식씨와 조씨.
"저는 선등을 무척 많이 섰어요. 먼저 올라가는 사람은 추락거리가 더 길기 때문에 더 위험하죠. 그리고 등반에서 추락은 일상이고요. 30년쯤 전 선인봉 하늘길이란 루트에서 '청자'라고 군용 자일을 갖고 등반하다가 그 전에는 줄을 잘 걸었던 곳에서 동작이 잘 못돼 추락한 적이 있어요. 30m 정도 떨어졌죠. 아예 등반이 시작되는 지점 아래에 풀이 우거진 곳까지 떨어져서 몸이 나무에 걸렸어요."
그 순간 주마등을 봤다. 떨어지는 동안 바위에 2, 3번 정도 부딪치면서 미끄러졌는데 그때 슬로비디오처럼 인생이 쭉 펼쳐졌었다고 했다. 다행히 예쁘게(?) 떨어져서 크게 다치진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추락은 계속됐고, 천운도 계속돼 병원에 입원할 정도의 부상은 입은 적이 없었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에서 밧줄에 매달려 해킹하는 장면처럼 땅바닥에 코앞까지 추락한 적도 있었지만 빌레이어의 기지로 부딪치는 것을 기적적으로 면하기도 했다.
"지금껏 살아온 게 그냥 기적인 것 같아요. 아니, 기적이란 말은 과분하고 그냥 운이 좋았다고 해야겠죠. 왜냐면 저는 같이 등반하는 사람들 대부분한테 '너는 너무 신중하다'고 답답해하는 스타일이었거든요. 좀 도전적인 편이죠. 물론 신중할 땐 신중하지만, 괜찮아 보이거나 필요할 땐 과감하게 몸을 던집니다. 오히려 과감하지 않으면 추락하기도 하는 것이 등반이죠. 꼭 겁을 먹고 몸을 사린다고 안전한 것만은 아니거든요."
한편 그가 이번 팔순 기념 등반을 포함해 지금도 열성적으로 등반한다는 소식은 지금 여러 백발의 등반가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이젠 등반할 나이는 지났다고 생각한 뭇 칠순 시니어 등반가들이 재작년부터 장비도 다시 구입하고 바위를 오르고 있다. 무대는 보통 불암산이다. 노년이 즐길 만한 적당한 난도의 루트가 많아 암장 이름이 아예 '시니어 암장'이란다. 본인들보다 나이가 더 많은 조씨가 활발하게 등반하니 가슴에서 완전히 꺼진 줄만 알았던 잔불이 잉걸불로 되살아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클라이밍은 트레킹과 달리 훨씬 더 많은 집중을 요한다"며 "그러니 치매예방에도 매우 도움이 되고, 단연 몸도 부쩍 좋아졌다"고 한단다.
지난 10월 26일 팔순 기념 선인봉 박쥐길 등반. 사진 박경식.
"등반은 중독이자 내 직업"
그렇다면 도대체 그에게 등반은 무엇일까? 또 산은 무엇일까? 그는 "고상하게 얘기할 것도 없고 날것 그대로 얘기하고 싶다"고 했다.
"등반이란 중독입니다. 말하자면 쾌감이죠. 인생에서, 살면서 쾌감을 느낄 일이 별로 없죠. 하지만 산에서, 특히 이 바위를 잡고 오르다 보면 그런 쾌감이 훅 들어옵니다. 그러니 중독되죠. 감기 걸려서 골골대다가도 일요일에 배낭을 메고 나가면 감기기운이 싹 날아갑니다. 엔돌핀이 돌고 삶의 이유가 되는 거죠. 그래서 저는 등반이 곧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직장에 나가듯, 산을 나가는 거죠."
그는 내적 자유라든가 그런 있어 보이는 말들은 일절 쓰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자유로움을 느낀 것 같긴 하지만 그런 걸 생각하면서 다닌 적은 없다고 했다. 그냥 산은 자신이 존재하는 장으로서 당연한 공간이었고, 거기서 등반하는 것 또한 당연했다. 산에 가기 위한 체력을 만들려고 버스 타고 가다가도 일부러 몇 정거장 남겨놓고 내려 걷는 것 또한 당연한 행위다.
월간산 12월호 기사입니다.
1945년생 조성환씨는 지난 10월 26일 도봉산 선인봉 박쥐길을 팔순을 기념해 등반하려고 했다. 후배들과 함께 자일을 묶고 야심차게 바위에 붙었으나 쏟아지는 비로 인해서 하이라이트인 2피치 언더 크랙 하단에서 등반 중단을 선언했다. 그래서 그의 팔순 기념 선인봉 등반은 실패가 맞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실패를 자백할 필요는 없었다. 바로 일주일 전에 연습 삼아 했던 등반에서는 동일 루트를 훌륭하게 완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팔순에도 정정하게 선인봉을 오르는 등반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가 조 오션파라다이스사이트 금이라도 계산적인 사람이었다면 슬쩍 연습 등반을 했던 날을 팔순 기념 등반일로 정해 버리고 성공했다고 떵떵거렸을 터다. 실패한 걸 성공했다고 하는 것도 아니니 그게 흠 잡힐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에게 엄격했다. 타협은 없다. 그런 고집이 있어서 등반 인생 내내 한 산에만 천착했다. 그게 바로 도봉산이다. 그는 처음 등반에 입 황금성슬롯 문한 이래 60년 가까운 세월을 오로지 도봉산 등반에만 쏟아 붓고 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새로운 물결도 만들어내고 있다. 이제 바위는 더 못 한다고 진작 체념했던 시니어 등반가들이 암장으로 속속 돌아오고 있단다. 팔순 클라이머 조성환씨는 왜 이토록 등반에 빠져 있는 걸까?
릴게임하는법 박영래 화백이 팔순에도 선인봉에 오르는 조씨를 위해 축전을 그려줬다. 사진은 18년 전에 선인봉을 등반하다 촬영한 것이다.
자유로운 등반을 위해 산악회에 가입하지 않았다
"1945년 황해도에서 태어났어요. 세 살 때 서울로 피란을 왔죠. 그때부터 쭉 서울에 살고 있어요."
골드몽게임 그는 담담하게 자신의 인생사를 돌이켰다. 평범한 회사원으로 직장생활을 했고, 10년 정도 식당일을 했다가 장사가 잘 안 돼서 접고, 사업을 몇 개 더 운영하다가 대형운전면허를 취득하고 버스 기사로 일했다고 요약했다. 유치원 통원버스와 현대백화점 셔틀버스를 각각 운행하다가 백화점 셔틀버스 운행금지법이 발의된 이후로는 유치원에서만 일했다. 그는 카카오야마토 인생 이야기는 재미없다는 듯 간략히 줄이더니 산 얘기를 시작하니 눈이 번뜩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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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엔 암벽화도 없었던 시절이에요. 군화를 신고 등반했죠. 그래서 아주 제한적이었어요. 지금이야 가파른 바위에도 쩍쩍 달라붙는 신발이 있어서 평평한 슬랩도 쭉쭉 기어오를 수 있지만 그땐 다 미끄러졌죠. 이 때문에 보통 등반을 한다고 하면 크랙을 따라서 오르는 경우가 많았요."
선인봉 박쥐길도 대표적인 갈라진 틈을 따라 오르는 크랙 루트다. 그는 이 박쥐길만 여태껏 300번이나 완등했다고 전했다. 표범길도 마찬가지로 300번 정도, 그 외에는 도봉산 곳곳에 자잘한 다른 루트나 바위를 따라 올랐다고 했다. 그렇게 늘 오르던 루트를 막상 팔순 기념 등반이라고 못 박은 날짜에는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미련이 없다"고 했다.
지난 10월 도봉산 선인봉 박쥐길을 등반하고 있는 조씨. 사진 박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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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 등반 때 오르기도 했고, 어쨌건 머릿속에 간단하고 단순하게 '팔순 기념으로 한 번 올라보자'는 식으로 도전했던 거라 딱히 의미 부여를 안 했기 때문에 별로 아쉬움은 없습니다. 어떤 프로젝트의 대상이었던 것도 아니고요. 사실 저는 더 등반하고 싶었는데 후배들이 너무 만류하는 통에 중단했죠. 그리고 좀 더 말하자면 이런 도전에 성공이니 정복이니 같은 개념을 두고 싶지 않아요. 제게 등반이란 일상입니다. 늘 바위를 올랐고, 그 날도 바위를 오르던 나날 중 하나였을 뿐이에요."
덧붙여 그렇게 오랫동안 계속 등반해 올 수 있었던 이유를 "순전히 운"으로 돌렸다. 마치 바위에 붙어 있으면 뒤에서 '너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다'라고 해주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런 속삭임이 들린 건 몇 번의 사고를 거친 후다.
팔순 기념 등반에 동행했던 요델산악회 박경식씨와 조씨.
"저는 선등을 무척 많이 섰어요. 먼저 올라가는 사람은 추락거리가 더 길기 때문에 더 위험하죠. 그리고 등반에서 추락은 일상이고요. 30년쯤 전 선인봉 하늘길이란 루트에서 '청자'라고 군용 자일을 갖고 등반하다가 그 전에는 줄을 잘 걸었던 곳에서 동작이 잘 못돼 추락한 적이 있어요. 30m 정도 떨어졌죠. 아예 등반이 시작되는 지점 아래에 풀이 우거진 곳까지 떨어져서 몸이 나무에 걸렸어요."
그 순간 주마등을 봤다. 떨어지는 동안 바위에 2, 3번 정도 부딪치면서 미끄러졌는데 그때 슬로비디오처럼 인생이 쭉 펼쳐졌었다고 했다. 다행히 예쁘게(?) 떨어져서 크게 다치진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추락은 계속됐고, 천운도 계속돼 병원에 입원할 정도의 부상은 입은 적이 없었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에서 밧줄에 매달려 해킹하는 장면처럼 땅바닥에 코앞까지 추락한 적도 있었지만 빌레이어의 기지로 부딪치는 것을 기적적으로 면하기도 했다.
"지금껏 살아온 게 그냥 기적인 것 같아요. 아니, 기적이란 말은 과분하고 그냥 운이 좋았다고 해야겠죠. 왜냐면 저는 같이 등반하는 사람들 대부분한테 '너는 너무 신중하다'고 답답해하는 스타일이었거든요. 좀 도전적인 편이죠. 물론 신중할 땐 신중하지만, 괜찮아 보이거나 필요할 땐 과감하게 몸을 던집니다. 오히려 과감하지 않으면 추락하기도 하는 것이 등반이죠. 꼭 겁을 먹고 몸을 사린다고 안전한 것만은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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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반은 중독이자 내 직업"
그렇다면 도대체 그에게 등반은 무엇일까? 또 산은 무엇일까? 그는 "고상하게 얘기할 것도 없고 날것 그대로 얘기하고 싶다"고 했다.
"등반이란 중독입니다. 말하자면 쾌감이죠. 인생에서, 살면서 쾌감을 느낄 일이 별로 없죠. 하지만 산에서, 특히 이 바위를 잡고 오르다 보면 그런 쾌감이 훅 들어옵니다. 그러니 중독되죠. 감기 걸려서 골골대다가도 일요일에 배낭을 메고 나가면 감기기운이 싹 날아갑니다. 엔돌핀이 돌고 삶의 이유가 되는 거죠. 그래서 저는 등반이 곧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직장에 나가듯, 산을 나가는 거죠."
그는 내적 자유라든가 그런 있어 보이는 말들은 일절 쓰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자유로움을 느낀 것 같긴 하지만 그런 걸 생각하면서 다닌 적은 없다고 했다. 그냥 산은 자신이 존재하는 장으로서 당연한 공간이었고, 거기서 등반하는 것 또한 당연했다. 산에 가기 위한 체력을 만들려고 버스 타고 가다가도 일부러 몇 정거장 남겨놓고 내려 걷는 것 또한 당연한 행위다.
월간산 12월호 기사입니다.


